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 거지요. 폼페이우스를 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도록 했던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로데가 임금의 자리에 올라 유대아와 다른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예수님 탄생 전후에 속한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1. 폼페이우스의 팔레스티나 원정/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공성(攻城)/ 폼페이우스의 영토 정리
- 2. 파르티아의 침공과 헤로데의 피신/ 헤로데의 발흥/ 헤로데 왕국의 확장/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헤로데의 건축 사업
- 3. 헤로데 왕국의 분할/ 유대아의 경제/ 에세느파
1. 폼페이우스의 팔레스티나 원정/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공성(攻城)/ 폼페이우스의 영토 정리
1) 폼페이우스의 팔레스티나 원정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 원정군과 … 지원군… 휘하의 로마군을 총동원하여 아리스토폴로스에게 진격했다. (고대사 14: 48)”
얀네우스가 죽은 후(기원전 76년)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가 기원전 67년까지 유대아를 통치했습니다. 그녀가 죽자 두 아들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 사이에 왕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히르카노스 2세는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의 천재적인 악인 이두매아 사람 안티파테르(Antipater)의 부추김을 받아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Aretas)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나바테아 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지만, 마지막에 로마가 개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전에 새겨져 있는 폼페이우스 모습)
셀레우코스 왕조를 물리친 로마는 점차 동방 헬레니즘 세계 전체를 합병해 나갔습니다. 기원전 88년부터 64년까지 로마는 동방에서 가장 위험한 적인 폰투스(Pontus)의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 왕과 싸웠습니다. 기원전 64년 미트라다테스를 물리친 폼페이우스는 다마스쿠스로 가서 셀레우코스 왕국을 합병하여 시리아 속주에 편입시킨 뒤, 유대아 쪽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휘하 지휘관들 중 스카우루스(Scaurus)를 유대아로 보내 휴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를 받아들여 후퇴를 하던 아레타스와 히르카노스는 요르단 근처의 파피론(Papyron)에서 아리스토불로스의 공격을 받고 철저하게 패배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폼페이우스는 이 두 적수를 자기 앞으로 불러들였고, 둘 중 유약한 히르카노스에게 유다인들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아리스토불로스는 요르단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알렉산드리움(Alexandrium) 요새로 피신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하여 디움, (아마도 가다라)와 펠라, 스키토폴리스를 지나 코레아이에서 유대아 본토로 진입했습니다. 그 후 예리코로 진격한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로스의 지지자들이 수도 예루살렘을 내주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폼페이우스의 오랜 숙적인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예리코에 도착했고, 사기가 최고조에 달한 로마군은 즉시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습니다.
2)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공성(攻城 ) (기원전 63년)
“우리는 자유를 잃고 로마에 종속되었다. 우리 손으로 획득한 영토를 … 다시 돌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대사 14:77)”
예루살렘 성문에 접근한 로마군은 도시 북쪽에 진을 쳤다. 상부 도시와 왕궁은 히르카노스의 사람들 수중에 있어 폼페이우스에게 성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에 아리스토불로스를 추종하는 이들은 상부 도시와 성전을 연결하는 다리를 무너뜨리고 성전산과 근처의 바리스에서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로마군은 성전 요새 주위로 방벽을 쌓고 북쪽에 진을 구축했습니다. 그들은 양면 공격 준비를 했다. 바리스의 ‘망대들’ 옆에 있는 해자를 건너 북쪽에서 공격을 하면서 동시에 서쪽의 무너진 다리에서도 공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사로를 쌓고 공성 장비들과 투석기를 배치했습니다. 유다인들이 안식일에 싸우기를 꺼려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작업은 손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그날은 물론 안식일이었습니다. 망대와 성벽이 무너졌고, 로마인들이 성전으로 침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사제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요세푸스 플레비우스에 의하면 이날 하루에 1만 2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지성소에까지 들어갔지만 성전이나 성전 보물들에 손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3) 폼페이우스의 영토 정리 (기원전 63-55년)
“그는 또한 5개의 의회를 구성했으며, 나라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었다. (고대사 14: 91)”
정복 후에 폼페이우스가 시작하여 가비니우스(Gabinius, 기원전 57-55년의 시리아 지방관)가 마무리한 영토 정리는 나바테아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했지만 이투래아인들에게는 조금 더 가혹했습니다. 또한 유다인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무자비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노스 시대 이후 유다인들이 점령한 그리스 도시들과 헬라 문화 영향을 받은 도시들을 ‘해방’하고, 그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이 그리스 도시들에 예속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마의 시리아 지방관의 지휘 아래 해안 지역의 가사(가자), 아조도, 얌니야, 요빠, 아폴로니아, 아레투사(아펙), 스트라토 망대, 도라(도르), 그리고 내륙의 마리사(마레사), 사마리아, 스키토폴리스 등의 자치 구역이 부활했습니다.
요르단 건너편에서는 가다라, 히포스, 아빌라, 디움, 펠라, 게라사가 ‘재건’되었다. 유다인들은 유대아 본래 땅, 이두매아 동부, 베레아, 갈릴래아 지역을 자신들의 정착지역으로 계속 유지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독립했고, 에스트렐론(이즈르엘) 평지는 갈릴래아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나바테아인들은 에스부스를 돌려받았고, 다마스쿠스에서 내쫓긴 것을 제외하고는 통치 구역에 변동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투래아인들은 세메코니티스(Samechonitis) 호수, 파니아스,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지역을 받았지만 지중해의 영토를 잃었습니다.
카르멜은 프톨레마이스에 편성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요빠와 그 주변 지역 및 에스드렐론(이즈르엘) 평원을 제외한 자신들이 밀집해 거주하던 지역들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폼페이우스와 가비니우스가 재건한 모든 그리스 도시들에는 전에 마카베오군이 쫓아냈던 주민들이 돌아왔습니다. 히르카노스 2세는 다시 예루살렘에서 대사제가 되었지만, 행정은 안티파테르가 맡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그의 가족은 로마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가비니우스는 그의 통치 기간 중 로마가 마케도니아에서 사용했던 방책을 유대아에 적용하여 5개의 시네드리아(Synedria, 의회, 구역)로 나누고자 했습니다. 시네드리아는 갈릴래아의 세포리스, 베레아의 암마투스, 예리코, 예루살렘, 그리고 이두매아 동부의 아도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유다인들의 결속을 깰 수는 없었으며, 시네드리아는 이내 해체되었습니다.
유대아는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간의 내전으로 이득을 보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승리가 분명해지자 폼페이우스를 이집트까지 추격했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군과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잇따른 사건에서 안티파테르는 (카이사르를 도우러 가는) 페르가몬의 미트라다테스 지원군에 큰 도움을 주었고, 카이사르는 이에 정당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히르카노스 2세를 유대아의 행정 장관(Ethnacrch, 에트나크)으로, 안티파테르를 나라의 실질적인 관리자로 임명했습니다. 또 유다인들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요빠와 에스드렐론 평원을 돌려주었습니다. 이후로 안티파테르는 이 땅에서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장자인 파사엘(Phasael)을 예루살렘 총독에 임명했고, 아직 소년이었던 차남 헤로데를 갈릴래아 총독으로 세웠습니다.
2. 파르티아의 침공과 헤로데의 피신/ 헤로데의 발흥/ 헤로데 왕국의 확장/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헤로데의 건축 사업
1) 파르티아의 침공과 헤로데의 피신 (기원전 40년)
“대사제 마타티아스와 유다인 공동체 (안티고노스의 동전)”
기원전 44년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내전이 다시 일어났지만 안티파테르와 그의 아들들은 로마의 여러 통치자들에게 복종함으로써 계속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통치자들 중에 유대아 주민을 압제한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Cassius)가 있었습니다. 그는 리따, 타므나, 고프나, 엠마오가 세금을 늦게 낸다고 해서 주민들을 노예로 팔고 성읍을 파괴했습니다. 기원전 43년 안티파테르가 반대파 중 한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으나, 아들인 헤로데가 원수를 갚고 불안을 제거했습니다. 이후 그는 형인 파사엘루스와 더불어 유대아 전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습니다(기원전 42년).
그로부터 2년 후 파르티아인들이 시리아를 침공하자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노스(Antigonus, 마타티아스[Mattathias])가 그들과 합류 했습니다. 안티고노스는 파르티아 왕 오르데스(Ordes)의 아들 파코루스(Pacorus)와 함께 해안을 따라 이동했고, 동시에 파르티아의 태수 바르자파르네스(Barzaphames)는 다마스쿠스에서 갈릴래아를 침공했습니다. 파코루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 카르멜의 유다인들과 샤론 평야의 거대한 삼림 지역인 드리무스(Drymus)의 유다인들이 합류했습니다. 여기에 예루살렘의 백성들마저 저항을 하자 파사엘루스와 헤로데는 어쩔 수 없이 파르티아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말았습니다. 파사엘루스는 바르자파르네스에게 굴복했지만, 히루카노스 2세와 함께 에크딥파 부근에 투옥되었습니다. 파사엘루스는 옥중에서 자살했고, 히르카노스는 불구가 되어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마타티아스 안티고노스는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헤로데는 약혼녀인 하스모니아 왕조의 마리암메(미리암네, Mariamme[알렉산드로스의 딸이자 아리스토불로스의 손녀)와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는 트코아(훗날 헤로디움[Herodium] 요새가 세워짐)에서 자신을 추격하던 이들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이두매아로 나아갔습니다. 헤로데는 호르헤사에서 형제인 요셉과 합류한 후에 마싸다로 진격했는데, 후에 이곳에 남겨진 그의 가족은 안티고노스에게 포위당하게 됩니다. 헤로데는 직접 사해를 건너 나바테아로 갔습니다. 아랍 왕 말쿠스(Malcus) 2세가 지원 요청을 거부하자 헤로데는 계속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다시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마싸다 포위는 상당히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성을 지키던 이들은 한 번의 기습 폭우로 간신히 물 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안티고노스의 동맹인 파르티아인들은 유대아를 공격한 후 유프라테스를 건너 돌아갔습니다.
2) 헤로데의 발흥 (기원 40-37년)
“그러나 그들은[하스모니아 왕조]은 내분으로 왕권을 잃었다. 그리고 왕권은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로데에게로 넘어갔다. (고대사 14:491)”
(헤로데 임금이 주조한 동전)
헤로데는 로마에서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와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ony)는 원로원을 설득해서 헤로데를 유다인의 왕으로 임명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두매아 서부와 사마리아인들의 땅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왕국 구석구석을 직접 싸워서 얻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지역들이 대적인 안티고노스의 수중에 있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은 그를 ‘이두매아인의 종’이라 부르며 증오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그와 동맹한 로마도 때때로 그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 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운 항구인 요빠가 적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헤로데는 프톨레마이스에 상륙했습니다. 기원전 39년 겨울 그는 갈릴래아에서 자신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갈릴래아에서 진격하여 요빠를 점령하고 마싸다로 나아가 가족을 구하여 이두매아로 돌려보낸 후 오르헤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헤로데는 로마의 지휘관 실로(Silo)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에게 매수된 실로는 포위를 풀고 해안에 있는 로마군 겨울 진영으로 가버렸습니다. 갈릴래아로 돌아온 헤로데는 기원전 39-38년 겨울, 논보라 속에서 세포리스를 점령하고 적들을 요르단 강까지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던 아르벨라의 동굴 요새를 기습 공격을 가했습니다.
기원전 38년 여름, 로마의 지휘관 마케루스(Macherus)가 헤로데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어요. 그는 헤로데의 막내 동생 페로라스(Pheroras)가 요르단 골짜기를 지나 알렉산드리움(사르타바)으로 진격하여 요새를 재건하는 동안 엠마오를 공격했습니다. 헤로데는 몸소 유프라테스 사모사타(Samosata)를 포위하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헤로데는 동생 요셉이 패배하여 안티고노스의 장군 파푸스(Pappus)의 손에 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헤로데는 예리코에서 유대아 산으로 출발하여 이사나 근처에서 파푸스를 격퇴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동맹군은 기원전 38-37년 겨울 다시 사마리아에서 마리암메와 결혼했습니다. 기원전 37년 여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안티고노스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제 헤로데는 유대아의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3) 헤로데 왕국의 확장 (기원전 40-4년)
“카이사르는 물론 그의 병사들까지도 헤로데가 자신들을 섬겨준 것에 비해 그의 영토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사 1:396)”
헤로데는 (과거 이집트의 영광울 꿈꾸며 유대아 땅을 노리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위협에도 자신의 지위를 지켜냈으며, 기원전 31년 악티움(Actium) 해전으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절대자 곧, 아우구스투스가 가다라와 히포스뿐 아니라 가사(가자)와 (아스칼론, [아스클론, 도라를 제외한]) 해안 도시들을 헤로데에게 하사함으로 왕국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해졌습니다. 기원전 23년에는 (산적의 잦은 출몰로) 통제하기 어려운 바타네아,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 지역을 하사 받아 평정했으며, 기원전 20년에는 파니아스와 가울라니티스도 다스리게 되었어요. 이렇게 하여 헤로데 왕국은 최대 규모로 확장되었습니다.
헤로데가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영토를 정복했을 때를 제외하고 무력으로 다른 곳을 정복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기원전 32년 전장에서 나바테아를 물리친 그는 에스부스를 합병하고 그곳에 노련한 군인들을 정착시켰습니다.
4)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헤로데의 건축 사업
“헤로데 성전을 보지 않은 이들은 결코 아름다운 건축물을 봤다고 할 수 없다. (바바 바드라[Baba Bathra] 4a)”
과시하기 좋아했던 헤로데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한편 통치를 굳건히 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적대하는 백성들을 회유하고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단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역과 세금으로 얻은 수익으로 상부 도시 북서쪽 모퉁이에 웅장한 궁전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궁전의 북쪽에는 세 개의 견고한 망대가 왕궁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각각은 형의 이름을 따서 파사엘루스, 아내를 기념하여 마리암메, 친구의 이름을 따서 히피쿠스라 불렸습니다. 또한 그는 부유한 친 헬라파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극장을 세웠으며, 겐나스(동산) 문에서 안토니아 요새에 이르는 제2성벽을 세워 도시의 북쪽 수비를 강화했습니다. 그는 성전산 남쪽 아마도 티로포에온 골짜기에 경기장도 지었던 듯합니다.
헤로데는 성전산에 대해서는 더욱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성전 주변 공터를 두 배로 늘리고 그 주변에 담과 주랑 현관(portico)들을 세웠는데, 광장 남쪽에 있는 ‘왕실 주랑 현관’(바실리카)이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또한 헤로데는 성전을 원형대로 복구하고, 그 성전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성전산 북서쪽 모퉁이에 있던 옛 바리스(Baris)를 거대한 요새로 재건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기념하여 ‘안토니아’(Antonia)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헤로데는 예루살렘 밖에서도 활발하게 건축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스트라토 망대 대신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를 세웠으며, 사마리아를 재건하고는 아우구스투스(세바스토스) 황제를 기념하여 ‘세바스테’(Sebaste)라 불렀습니다. 또 게바와 파사엘리스, 안티파트리스에도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계속해서 헤로데는 헤로디움(Herodium)과 예리코 부근에 요새들을 세웠고, 사해 해안가에 마주 보고 있는 마케루스(Macherus)와 마싸다(Massada)를 완전히 다시 세웠습니다.
3. 헤로데 왕국의 분할/ 유대아의 경제/ 에세느파
1) 헤로데 왕국의 분할 (기원전 4-기원후 6년)
“카이사르는 … 아르켈라오스를 왕이 아니라 사실상 나라 절반을 다스리는 분봉왕(ethnarch)으로 세웠고 … 안티파스는 … 베레아와 갈릴래아를 받았으며… 바타네아, 트라코니티스, 가울라니티스는 필립에게 주어졌다… (고대사 17:317-319)”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오랜 망설임 끝에 헤로데의 유언에 따라 그의 왕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했습니다. 헤로데가 사마리아 여자 말타케(Malthace)를 통해 얻은 아들 아르켈라오스는 유대아, 이두매아, 사마리아의 분봉왕(ethnarch)에 임명되었습니다. 카이사리아와 세바스티아의 도시들이 그의 영토에 포함되었는데, 이곳은 유다인과 비유다인들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지요. 둘째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순전히 유다인들이 사는 곳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갈릴래아와 베레아(트랜스요르단) 두 지역을 분배받았습니다. 셋째 아들 헤로데 필리포스는 카이사리아 파니아스와 함께 가울라니티스, 바타네아,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 등 새로이 개척한 땅을 받았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대부분 비유대인었던 것 같지만, 헤로데 대왕이 이 땅에 정착시킨 유다인들은 헤로데 왕가에 충성했습니다. 헤로데의 여동생인 살로메(Salome)는 얌니아와 아조도, 요르단 골짜기의 파사엘리스를 받았고, 헤로데의 통치에 불만이 많았던 가사(가자), 가다라, 히포스는 시리아 속주에 편입되었습니다.
헤로데의 아들들은 한결같이 아버지를 따라 도시 건축에 힘썼습니다. 아르켈라오스는 새로운 거주 지역을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켈라이스라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안티파스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여 이름 붙인 티베리아스를 비롯해 세포리스, 그리고 황제의 모후를 기념하여 리비아스를 건설했습니다. 필리포스 2세는 카이사리아 파니아스를 확장하였는데, 이때부터 이 도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로 불리게 되었다습니다 그는 또한 벳사이다 부근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 율리아를 기념하여 율리아스를 기념했습니다.
아르켈라오스는 짧은 기간 폭정을 일삼다가 기원후 6년에 쫓겨났고, 그의 땅은 로마의 행정 장관에 넘겨졌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후 39년까지 권력을 지키다 물러났으며, 필리포스만이 기원후 34년 죽을 때까지 분봉 영주(tetrarch, 네 명의 공동 통치자 중의 한 사람) 직을 유지했습니다.
2) 유대아의 경제 (기원전 4세기-기원후 1세기)
“우리는 해양국이 아니면 교역도 없다… 우리는 이 축복받은 비옥한 땅을 일구는 데 힘 쓰는 일이다. (아피온 반박문 1:60)”
유대아는 풍부한 농산물 덕분에 제2성전 시대에 번영을 누렸는데, 이러한 번영은 헬라 시대, 주로 얀네우스(Janneus)가 통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상 밀 재배에 적합한 지역은 거의 없었고, 그 규도 에스드렐론 골짜기, 해안 평야 일부 지역, 그리고 몇몇 넓은 산골짜기 등으로 제한적이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밀 대신 보리농사를 지었고, 산지에서는 올리브와 포도를 재배했습니다. 대추야자는 무더운 요르단 골짜기에서, 발삼나무는 예리코 부근의 왕실 소유지에서 주로 자랐습니다. 유대아 남부 산지에서 생산되는 양털은 백성들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요르단 양편 산지의 서쪽 경사면은 늘 넓은 삼림 지대로 덮여 있었으며, 사론 대부분은 울창한 참나무로 숲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은 양과 소의 목초지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 및 일반적인 도시 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산업들이 있었습니다. 원료 산지와 관계된 도기 산업은 아마도 주요 국가 산업이었던 듯하며, 나머지(주로 방직)는 가내 수공업이었습니다. 갈릴래아 바다와 지중해에 어선이 늘어났고, 자주 염료를 만드는 뿔고등 껍질은 모아져 아조토와 도라(도르) 및 그 너머의 북쪽 지역에서 가공되었습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이 있는 곳’을 뜻하는 타리키아이(Taricheae)에는 생선 저장업이 있어 수출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라바의 구리, 길앗 산지의 철, 사해의 역청 등이 주요 천연자원이었으며, 여기에 칼리로에와 바아라스의 온천뿐 아니라 펠라, 가다라, 티베리아스 부근의 온천들도 추가해야 합니다.
3) 에세느파
“공동체에 입문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서약해야 한다. (훈련지침서 1:16)”
제2성전 시대가 끝나갈 무렵 종파 운동이 부상하면서 추종자들 간에 경쟁과 대립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요세푸스 바리사이, 사두가이, 에세느 등 3개의 주요 종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열혈당(Zealots)은 종교 분파가 아니라 민족주의적 종교관을 갖고 있었는데, 바리사이파와 에세느 사람들 중에도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에 대한 정보는 기원후 2-3세기에 비로소 기록으로 남겨진 구전 율법에서 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에세느파에 관해서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사이에 유대아 사막에서 당대의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세느파는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에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을 발전시킨 듯합니다. 이들은 얀네우스 통치 시대에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수많은 에세느파를 추종하는 이들과 그들의 지도자-아마도 ‘정의로운 선생’이라고 불렸던 창시자-는 자진해서 유대아 사막으로 도피했습니다. 이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사막에서 생활했는데, 주변 세상과 단절된 채 기본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건조한 사막 기후 덕분에 그들의 기록 중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이 두루마리를 통해 그들의 생활 방식이나 문화와 관련하여 많은 것들을 추측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다양한 분파와 종파들이 에세느파라고 불리고 있으며, 유대아 사막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이 모두 에세느파의 것인지는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많지요. 적어도 이들 중 일부는 바리사이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에세느파 중에는 바리사이파와 상당히 비슷한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보통 에세느파는 구전 율법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문법(토라)에 관한 부록과 해석이 그들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기록 어디에도 그들의 지도자들을 성경을 해석하거나 바꿀 만한 권위자로 여겼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에세느파의 신조는 사실 ‘메시아를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들에는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강한 믿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 신앙은 초기에는 적극적이고 정치적이었지만, 후에는 그 성향이 다소 완화되었다. 이후 로마에 대한 모반이 일어났을 때, 에세느파는 저항군의 편에 섰고, 이로 인해 유대아 사막 키르벳 쿰란에 있던 그들의 중심지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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