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포리/ 나할랄/ 크술롯 (이스라엘 북부 하부 갈릴래아의 나자렛 지역 1)

이스라엘 북부 하부 갈리래아 나자렛 지역 성경 지명들

(하부 갈릴래아의 나자렛 지역 성경 지명들)

치포리는 이스라엘 북부 하부 갈릴래아의 나자렛 지역에 위치한 예수님 당시 행정 수도였습니다. 나자렛 지역에 위치한 나할랄, 그리고 크술롯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치포리는 발굴된 유적을 통해 당시에 번영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지요.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나할랄과 크술롯은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치포리 또는 세포리스(Zippori, [צִפּוֹרִי], Σέπφωρις)

이스라엘 하부 갈릴래아 나자렛 지역의 치포리 유적 전경

(이스라엘 하부 갈릴래아 나자렛 지역의 치포리 유적 전경)

치포리 국립공원은 남쪽의 나할 치포리와 북쪽의 베트 네토파 계곡 사이의 석회암 언덕 지역인 서부 하부 갈릴래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치포리’는 히브리어 ‘새 (bird)’를 의미합니다. 치포리 유적 언덕의 모습이 마치 새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이름을 치포리(새)라고 부르고 있는 거지요.

치포리는 예수님께서 유년 시절을 보내셨던 나자렛에서 불과 10km 정도의 거리에 있었던 하부 갈릴래아의 행정 수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부모님과 함께 치포리를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도시의 생활, 문화, 즉 그리스-로마 문화 생활 양식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를 통해 치포리에서 일어났을 여러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지요.

1) 치포리의 위치: 32º 45’ 11. 73” N 35” 16’ 44. 77” E

2) 치포리의 역사

치포리는 기원전 65년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할 때 이미 갈릴래아의 중심 수도였습니다. 서기 2세기에 라삐 예후다 하나시(Yehuda Harassi)는 산헤드린을 치포리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미쉬나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의하면 치포리에서 성모 마리아의 부모님이 사셨던 장소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 플레비우스는 치포리가 “갈릴래아 전체의 영광”이라 불렸다고 증언합니다. 도시에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지요. 그리고 유다인들의 영적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라삐 유다 하나시는 산헤드린을 벳 세아림에서 치포리로 옮기고, 많은 학자들이 이곳에 살았습니다. 서기 220년에 이곳에서 미쉬나를 완성했지요. 3세기 중반에 산헤드린이 다시 티베리아스로 옮겨지면서 치포리는 갈릴래아 중심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도시에 성모님의 부모님인 요아킴과 안나가 살았다는 전통 때문에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비잔틴-십자군 시대의 성당 유적들을 통해 순례자들이 이곳을 기념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아랍시대가 되면서 도시는 그 명성을 잃고 점차 잊혀 갔습니다. 십자군 시대의 “La Sapporo”는 갈릴레아의 중요한 도시이자 요새가 되었습니다.

3) 치포리의 고고학적 의의

치포리 발굴은 1931년에 미국의 미시간 대학교 레로이 워터맨(Leroi Waterman)이 이끄는 팀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팀은 부분적으로 재건된 극장의 일부, 십자군 요새의 기초와 나자렛 언덕의 샘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한 수계를 발굴했습니다.

1983년에는 제임스 스트렌지(James Strange) 교수가 이끄는 플로리다 주 탬파 대학교의 대표단이 발굴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발굴팀은 언덕의 경사면, 극장 및 하부 도시에서 발굴된 무덤과 구조물에 대한 조사를 착수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대형 공공건물의 모자이크 바닥이 드러났지요.

치포리에서의 고고학 발굴 작업을 통해 그 당시의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 유물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로마-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건축물들과 주랑의 거리, 그리고 모자이크 바닥들은 당시 이 도시가 얼마나 화려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치포리의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물은 대개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속하는 유적과 유물이지요. 전성기 시대에 약 3만 명의 유다인과 이방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개인, 산업, 공공 건물 및 포장도로를 장식한 수많은 화려한 모자이크들입니다(40개 이상).

1985-1989년에는 요새, 유대인 주거 지역 및 디오니시우스 하우스 주변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원형 극장과 하부 도시를 발굴했지요.

1990년부터 나일 축제의 집, 회당, 주요 거리, 그중에서도 카르도, 데쿠마노스, 오르페우스 모자이크, 로마시대의 신전, 목욕탕, 그리고 기둥들의 건물을 발굴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저수지를 발견해 해마다 발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4) 치포리에서의 눈 여겨볼 유적들

1) 십자군 시대의 성과 전망대

치포리 유적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히한 전망대로 십자군 시대에 주변의 잔해물로 지어졌습니다. 전망대에서 치포리의 고대 도시 유적을 잘 조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부 갈릴래아, 벳 네토파 계곡(Bet Netofa Valley), 투란 계곡 (Tur’an Valley)과 요드팟 산맥 (Mt. Yodfat), 멜론 언덕, 나자렛, 카르멜 산맥 등을 두루 조망할 수 있습니다.

이 성은 1187년 히틴 전투를 할 때 십자군들이 주둔,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채 위 층은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2) 원형 극장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복원된 로마 극장이지요. 기원전 1세기 말에 지어진 4,500석 규모의 극장은 암석으로 이뤄진 경사면을 깎아 만들었습니다. 좌석에 앉으면 아름다운 벳 네토파 계곡과 상부 갈릴래아 언덕을 잘 조망할 수 있답니다. 요즘에도 종종 음악회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3) 유다인 거주 지역

미쉬나와 탈무드 시대(기원후 2-4세기)부터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집터, 정결례 욕조 유적 유물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일부 지역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많은 정결례 욕조와 저수가(미크베)가 남아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사제들 후예가 이곳에 살았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4) 디오니소스 하우스 (Dyonisus House)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의 생애 장면 장면을 묘사한 모자이크 바닥이 남아 있는 로마시대의 빌라 주택터 입니다. 이 모자이크에서 “갈릴래아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을 얻는 여성 이미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지요. 이는 모자이크 예술의 정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 나일 페스티벌 하우스 (Nile Festival House)

비잔틴 시대의 공공 장소로 알려진 페스티벌 하우스는 11개의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모자이크에 정교하게 표현된 나일강의 풍요로운 모습과 나일강 축제와 신화 이야기를 생생하며 감상할 수 있습니다.

6) 고대 저수지

치포리 유적의 고대 수로와 물 저장소

(치포리 유적의 고대 수로와 물 저장소)

로마시대부터 7세기까지 사용되었던 260m나 되는 긴 지하수 시설입니다. 이곳은 지표면보다 훨씬 깊이 들어가 있는 저수지로써 근처에 갱도 터널이 있어 내부를 걸어보면서 그 당시에 도시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노고를 알 수 있습니다.

7) 회당

비잔틴 시대 말기(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고 좁은 바실리카와 같은 구조로 지어진 회당입니다. 바닥에 표현된 모자이크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네 부분으로 나뉘어 성경 이야기를 묘사하고, 성전과 관련된 여러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8) 도시의 거리들 (Streets Layout)

도시를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카르도(Cardo)와 데코마누스(Decumaus) 사이의 교차로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카르도를 포장한 돌에 파인 세로 홈은 로마의 수레바퀴가 수없이 다녔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 거리는 도시 시장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 나할랄(Nahalal, [נהלל], 초장/나할롤), 텔 엘 베이다(Tell el-Beida)

1) 나할랄의 위치: 32º 40’ 44. 62” N 35” 11’ 48. 95” E

2) 나할랄의 특징과 역사

나할랄은 즈불룬 지파에게 상속되었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주민을 쫓아내지 못한 곳입니다(여호 19, 15; 21, 35). 나할랄은 나할롤(판관 1, 30)과 같은 장소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할랄로 추정되는 장소는 두 곳입니다. 이즈르엘 계곡의 텔 엘 베이다(Tell el-Beida)와 아코 평야 남쪽에 있는 텔 엔 나흘(Tell en-Nahl)입니다. 텔 엔 나흘은 알람멜렉 추정지이기도 하지요. 

나할랄을 텔 엘 베이다로 보는 근거는 이곳이 세 개의 샘물이 있어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 이름의 뜻과 연결되기 때문이지요. 이곳은 초기 청동기부터 초기, 후기 철기 시대와 페르시아, 로마, 그리고 비잔틴 시대까지의 주거지였습니다.

이곳 가까이에 1921년에 나할랄이라는 모샤브가 세워졌습니다. 이곳의 남쪽에서 중기, 후기 청동기 시대의 건물 및 유적이 발견되었고, 남동쪽 경사지에서 철기 시대 말경의 건물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시대에 깎은 돌로 만든 모퉁이가 드러났습니다. 서쪽에서 비잔틴 시대의 벽과 5-6세기 때의 동전들이 발견되었으며 십자군과 마믈룩 시대의 토기와 거주 흔적도 발굴되었습니다.

3) 성경 속의 나할랄

여호 19, 15: 이렇게 카탓, 나할랄, 시므론, 이드알라, 베들레헴까지 포함하여 열두 성읍과 거기에 딸린 촌락들이다.

여호 21, 35: 딤나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 나할랄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

판관 1, 30: 즈불룬 지파도 키트론 주민들과 나할롤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가나안족이 그들과 섞여 살다가 노역을 하게 되었다.

3. 크술롯(Chesulloth, [כסולות], 신뢰), 키슬롯 타보르/ 익살(Iksal)

1) 크술롯의 위치: 32º 40’ 53. 18” N 35” 19’ 14. 75” E

2) 크술롯의 특징과 역사

즈불룬 지파와 이사카르 지파의 경계에 있었으며 사릿과 다브랏 가까이에 있었던 이사카르 지파의 성읍입니다(여호 19, 18). 이곳은 성경에 한 번 기록된 지명인 키슬롯 타보르(여호 19, 12)과 같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마을의 동쪽에서는 십자군과 마믈룩 시대의 아치모양의 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익살은 고대 이름을 보존하고 있지만 철기 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익살은 크슬롯과 연결되는 지명을 지닌 성경의 장소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현대 아랍 마을 익살(Iksal)은 크슬롯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요세푸스에 의해 샬롯(Xaloth)으로 알려진 마을이며 1838년에 에드워드 로빈슨이 기록한 마을이기도 하지요. 이곳은 현재 아랍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발굴을 통해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을 매장했던 동굴, 석관, 공동묘지, 토기, 접시, 보석, 농기구와 포도주틀이 발견되었습니다.

3) 성경 속의 크술롯

여호 19, 18: 그들의 영토 안에는 이즈르엘, 크술롯, 수넴,

여호 19, 12: 또 사릿에서 해 뜨는 동쪽으로 돌아 키슬롯 타보르 경계에 다다른 다음, 다브랏 쪽으로 나가다가 야피아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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