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가 죽고 아직 임금이 없었던 시대에 하느님은 판관을 세워 다스리게 했습니다. 판관들은 주변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지요. 각 지파에서 출현했던 판관들의 활동들을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판관들의 전쟁: 에훗, 기드온(기원전 12-11세기)
- 2. 가나안 북쪽의 메롬 물가의 전투와 드보라의 전쟁
- 3. 아비멜렉의 왕국(기원전 12-11세기)과 입타의 전쟁(기원전 12세기 말-11세기)
- 4. 삼손 시대의 유다와 필리스티아, 기브아 소실 이야기, 지파별 판관들
- 5. 에벤에제르 전투 (기원전 11세기 중반)와 사무엘의 사목
1. 판관들의 전쟁: 에훗, 기드온(기원전 12-11세기)
기원전 12세기에는 지파들이 각자의 상속 기업에 정착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판관기는 주로 인근 지역이나 사막에서 온 침입자들과 벌인 전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요. 이 침입자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올 때마다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하셨습니다(판관 2,16). 부름을 받은 판관은 지파들을 소집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후에도 이들은 백성들을 계속 다스렸습니다. 판관들 주위로 모여든 용사들의 수는 많지 않았으며, 그들이 속한 지파나 이웃 지파에서만 소집되었습니다. 용감한 판관의 지휘 아래서 몇 백명의 무리가 불시에 침입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맞대결한 무리들 역시 작고 조직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판관들 중 유일하게 크나즈의 아들 오트니엘만이 남쪽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치른 전쟁의 역사적 상황이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요. 벤야민 지파 출신인 에훗은 에프라임 산악지대 남쪽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활동했습니다. 그의 용맹한 업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모압 왕이 암몬과 아말렉의 지원을 받아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로 침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기드온은 므나쎄 지파 출신으로 아비에제르 사람이며 오프라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프라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기드온의 형제들이 타보르 산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이즈르엘 평야에서 오프라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비에제르족은 스켐의 남서쪽 산악지역에 거주했다고 알려집니다. 이곳에서 로마 시대 후기의 유적이기는 하지만 이 지명의 흔적을 갖고 있는 듯한 키르벳 오파르(Khirbet ‘Awfar)가 발견되었어요. 성경의 오프라는 아마도 이 근방의 철기시대의 유적지로, 요탐은 이곳에서 걸어서 쉬게 그리짐 산으로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탐이 달아났던 브에르는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도기 파편)에 기록되어 있는 ‘브에림’과 같은 장소로 보입니다. 기드온의 전쟁이 이사카르 지파의 땅에서 일어났음에도 이사카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드온의 대적은 기동력이 좋은 유목민 약탈자들로 낙타를 타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사막에서 잠입해 들어와서 탁 트인 정착지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주민들을 괴롭히면서 계곡들을 자기들의 가축 떼와 천막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기드온은 단순히 적진에 공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침입자들을 멀리 사막 안쪽까지 추격해서 몰아 냈습니다.
2. 가나안 북쪽의 메롬 물가의 전투와 드보라의 전쟁
성경은 이스라엘 지파와 갈릴레아의 도시들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 두 번의 주요 접전, 즉 메롬 물가 전투(여호 11, 1-15)와 드보라와 바락의 전투(판관 4, 5)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하초르 왕 야빈이 가나안 동맹국의 우두머리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건은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1) 메롬 물가 전투
메롬 물가에서 벌어진 전투 기사에는 네 개의 가나안 도시들만 언급되어 있어요. 가나안 사람들은 상부갈릴레아의 중심지인 메론/메롬 물가에 모였습니다. 후퇴하는 가나안 군을 큰 시돈과 미츠로봇(마임)까지 추격하고 동쪽으로는 미츠파 골짜기까지 추격(여호 11,28)했다는 기록은 전투가 상부 갈릴레아에서 벌어졌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본래 이와 관련된 지파는 납탈리인 듯하고, 아세르 지파도 가능성이 있는데, 이들의 최초 정착지는 고고학 조사로 밝혀진 것처럼 상부 갈릴레아의 고산 지역이었습니다.
여호수아에서는 이 원정의 지휘권이 여호수아에게 있었으며, 가나안 하초르를 무너뜨린 것도 그의 업적으로 타나 납니다. 고고학 발굴로 이 가나안의 큰 도시가 대규모로 파괴된 것이 밝혀졌지만, 그 정확한 연대는 유물만으로는 입증할 수 없으며 공격한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2) 드보라의 전쟁-병력 배치 (기원전 12세기)
드보라의 전투는 지리적으로 정밀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서사 중의 하나로, 산문과 운문이 서로 그 내용을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낫의 아들 삼가르가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무찌른 사건이 이 전투 전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판관 3,31). 어쩌면 드보라의 전투는 이 사건, 곧 벳 스안(벳 산)에 주둔해 있던 필리스티아 군(1사무31,10.12)과의 충돌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요. 상황은 점점 어렵게 되어갔고, 도로 주변의 안전은 심각한 위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난폭한 부족민들 때문에 아루나 산길을 지나는 것이 위험했다는 아나스타시 파피루스 제1호의 기록과도 비교해 볼 수 있어요. 산악 지대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지파들과 비옥한 농경지를 비롯해 대부분의 수원지를 차지하고 있던 가나안 도시국가들 간의 갈등이 결국 전쟁으로 분출되었고, 바락은 백성들을 소집하여 어둠을 틈타 타보르 산에 집결했습니다. 이 거룩한 타보르 산은 즈불론과 납탈리, 그리고 이사카르 지파의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신명 33,18-19). 즈불론과 납탈리가 가장 많이 파병하였고, 에프라임 산악지대의 세 지파와 이사카르 지파에서 온 지원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이사카르는 주로 이즈르엘 골짜기 남쪽 주변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지배 아래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창세 49,14-15).
마키르는 이때까지도 이즈르엘 계곡 정남 쪽의 에프라임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가 트랜스요르단으로 옮겨가면서 그의 후손은 그쪽 므나쎄 지파의 한 분파로 생각되었습니다.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의 고향인 납탈리 케데스는 상부 갈릴레아에 있는 가나안의 케데스(여호20,7; 21,32; 1 역대 6,76)가 아니라 타보르 산에서 도보로 불과 몇 시간 거리에 있는 키르벳 케디쉬(Khirbet Kedish)로 갈릴레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이스라엘의 넓은 지역입니다.
판관기에는 전쟁에 참여한 가나안 왕들의 명단이 일일 기록되어 있지 않지요. 그러나 여호수아 12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이 정복한 가나안 왕들의 명단에는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스라는 하로셋 고임에서 가나안의 전차 부대를 모으고 키손 강 상류를 건너 타보르 산으로 진격했습니다.
결전의 날에 비가 오기 시작했고 가나안의 전차들은 계곡 바닥 진흙 수렁에 빠졌습니다. 상황이 유리해지자 용기를 얻은 이스라엘 군사들은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지요. 비로 인해 키손 강이 범람하여 빠져나가기가 어려워지자 가나안 전사들은 전차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나가면서 승리하고 “므기또의 물가 타아낙”으로 돌아와 큰 포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은”을 약탈해 오기는커녕 키손 강 급류에 휩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스라도 자신의 전차를 버렸으나 본영이 있는 하로셋 고임으로 달아나는 대신에 하부 갈릴레아의 산악지대를 경유하여 요르단 계곡으로 갔고, 카인족 헤베르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헤베르의 집안은 모세의 장인 호밥의 후손들이며, 아랏 광야에 정착한 카인족의 조상이었습니다(판관 1,16). 납탈리 지역 남쪽 차아난님 참나무(여호19,33)에 위치한 그의 천막은 아마 제사 중심지였던 듯합니다(창세 12,6, 스켐 땅 모레 참나무). 헤베르의 아내 야엘은 아마도 가나안과 이스라엘 양쪽 모두에 잘 알려져 있는 여 예언자였던 것 같습니다. 시스라는 그녀의 성소에 몸을 숨기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손에 죽고 말았지요.
하로셋 고임은 ‘경작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말로 갈릴하고임(이사9,1: 이방의 갈릴레아)과 같은 곳으로 간주됩니다. 하로셋은 “경작지”를 뜻하는 말로, 이즈르엘 계곡 남쪽에 위치한 비옥한 농경지를 가리키는데, 투트모스 3세 시대부터 왕을 위해 경작되던 왕실 소유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시스라의 임무는 수익성이 좋은 이 농경 중심지에서 가기의 주인인 하초르 왕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지요(판관4,2.13.16). 이야기에 나오는 하로셋 고임(판관 5,19)은 드보라의 노래에 언급된 “므기또의 물가 타아낙”과 같은 장소입니다.
드보라의 승리가 가나안 하초르 왕 야빈을 점점 강하게 짓눌렀다(판관 4,24) 면, 메롬 물가의 전투로는 하초르를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할 수 있지요(여호 11,10-11). 학자들은 이것을 기준으로 드보라의 승리가 메롬 전투의 승리보다 앞선 사건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 아비멜렉의 왕국(기원전 12-11세기)과 입타의 전쟁(기원전 12세기 말-11세기)
1) 아비멜렉 왕국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3년 간의 통치는 판관 시대 특유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배권 상속, 즉 왕권을 확립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스켐에 사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지요. 가나안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모계 혈통 때문에 그를 자기들의 형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알 브릿 신전에서 은 일흔 세켈을 꺼내어”그에게 주었습니다(판관 9,4). 실제로 벳 밀로(Beth-millo 밀로 족/밀로 궁)이라고도 불리는 이 가나안 신전 유적이 스켐 발굴 작업 중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스켐의 통치자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고, 스켐과 실로 사이의 아루마(Arumah)를 자기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머지않아 매우 악화되었지요. 그 이유는 가나안 주민들이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판관 9,28) 아비멜렉은 스켐을 그 기초까지 모조리 파괴했을 뿐 아니라 에프라임 산악지대와 므나쎄 지파 중에 남아 있던 다른 가나안 도시들에까지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테베츠 요새(망대)를 포위하던 중에 죽임을 당해, 그의 짧은 통치도 끝을 맺었습니다. 테베츠의 위치는 정확히 어디인지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테베츠는 아마도 스켐 근처에 있는 가나안의 주요 도시인 티르차가 와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여호 12,24).
2) 입타의 전쟁 (기원전 12세기 말-11세기)
길앗의 아들 입타의 이야기는 영웅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수많은 문화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지도층의 한 명이라 그가 창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수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처의 아들들이 그를 쫓아내자 사막 변두리 도시인 톱으로 도망가 살았습니다. 건달들이 그에게 모여들어 그와 함께 노략질을 일삼았지요. 이렇게 하여 입타는 청동기시대 아피루(‘apiru)와 상당히 비슷한 떠돌이 용사들로 구성된 사병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길앗의 원로들은 입타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그를 우두머리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길앗의 미츠페로 이주하여 암몬 왕과 외교적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사절단이 항상 여러 명, 그러나 실제로는 관례대로 두 명 정도였을 거라는 데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지요. 판관기 기자는 이 기회에 이스라엘이 트랜스요르단 고원 지대를 점령해야 할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에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 헤스본 왕 옥을 물리치고 아르논에서 야뽁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모압이나 암몬 누구도 이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입타는 자신의 병력으로 암몬 사람들을 완전히 무찔렀습니다. 시스요르단(요르단 서편, 현재 이스라엘)의 에프라임족은 이 승리의 소식을 듣고 자신들도 함께 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에 화를 냈고, 지파들 간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에프라임족이 ‘쉬뽈렛’이라 발음하던 ‘쉬뽈렛’이란 암호를 대도록 한 이야기는 여러 지파들이 아마도 요르단 강 서편으로 건너가기도 전에 이미 특색 있는 자기들의 방언을 발전시켰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입타의 딸을 희생했다는 기사는 지중해 동부 문화권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보이는데, 아가멤논 왕도 딸인 이키게네이아를 희생시켜 아카이아의 배들을 트로이로 항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외에 이러한 문화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트랜스요르단(현재 요르단)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한 예로 길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매장한 일입니다(1 사무 31,11-13).
4. 삼손 시대의 유다와 필리스티아, 기브아 소실 이야기, 지파별 판관들
1) 삼손 시대의 유다와 필리스티아
“… 그때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다(판관 14,4).”
삼손의 영웅담에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이었던 필리스티아와의 싸움이 나타나 있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기원전 1150년경 남쪽 해안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했지요. 처음에 그들이 주로 정착한 지역은 소렉 골짜기까지로, 해안가의 가자, 아스클론, 아스돗과 내륙의 가드와 에크론 두 성읍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청동기 말에 점령된 것으로 보입니다.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이들이 사용하던 에게 해의 도기 양식 곧 미케네 III C 단색 도기가 유입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고 한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두 가지 색의 양식 도기로 발전되었습니다. “필리스티아 도기”라 불리는 이것에는 에게 해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이들이 받아들인 가나안 지역 문화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은 벤야민과 에프라임 지파 지역, 즉 중앙 산지에 집중되어 있지요. 그러나 단 지파 사람인 삼손과 그 가족은 유다 지파 땅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다와 필리스티아의 경계는 유다 지역 세펠라 가장자리를 따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삼손에 관한 이야기는 소렉 골짜기에서의 삶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초라와 필리스티아의 팀나에서 일어났는데, 후자는 에크론의 파생 도시가 분명합니다. 삼손은 높은 산지에 위치한 초라에서 소렉 골짜기에 있는 팀나로 “내려갔다…”(판관 14,1). 삼손과 그의 가족은 다른 단 지파 사람들과 함께 북으로 올라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이미 유다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판관 15,11). 이 영웅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유다 지역의 마을들에서, 특별히 필리스티아와 마주보고 있는 경계 지역에서 대단히 인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2) 기브아 소실 이야기 (기원전 12-11세기)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나섰다. 단에서 브에르세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길앗 땅에서도 온 공동체가 일제히 미츠파로 주님 앞에 모여들었다(판관기 20,1).”
판관기는 어떤 레위 사람의 소실이 벤야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사람들에게 윤간을 당한 후 벤야민과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 사이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이 이야기는 판관 시대의 전반적인 상황-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21,25)-을 담고 있지요. 당시 이스라엘은 중앙 정치 체제가 아니었지만 중앙 성소를 중심으로 지파들의 연맹이 형성되어 있었고, 한 지파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이를 징계하기 위해 위원회가 소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벤야민 간의 전쟁이 일어났던 역사적 배경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초기에 발생했던 것이 분명한데, 판관 시대 말의 벤야민은 강력하고 안정된 지파로, 사울 왕 때 벤야민에 속한 기브아가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손자이며 엘아자르의 아들 피느하스가 하느님의 계약 궤를 모시고 있었다(판관 20,26-28”)는 언급으로 보아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정착 초기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지파별 판관들 (기원전 12-11세기)
“주님께서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판관 2,16).”
판관기는 이스라엘 왕정 이전 시대의 여러 지파 영웅들의 공로를 칭송하면서도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해 준 판관들조차도 결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왕정 시대의 삶이 훨 더 낫다는 사실을 미묘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시작되는 1장에서는 정복하지 못한 성읍 이름을 언급하며, 후에 가나안 주민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제 노역과 같은 제도는 다윗과 솔로몬 통치 기간에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판관기의 마지막 두 기사는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던(판관21,25)” 시대, 특히 사울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왔던 곳과 같이 사회적 무질서와 타락이 심했다.
판관기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대판관들 외에 ‘소 판관들(minor’들도 언급하고 있는데(판관 10,1-5;12,8-15),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다스렸습니다. 성경에서는 보통 소 판관들의 부유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들이 이끌었던 전쟁에 관한 전승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 판관들(minor Judges) 다섯 명을 포함하여 판관기에 언급된 판관들은 모두 열두 명으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배출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판관 시대의 적대자들과 판관들의 활동]
판관 이름 | 적대자/억압햇수 | 해방과 평화 시기 | 성경 | 통치한 햇수 |
1. 오트니엘 | 메소포타미아/ 8 | 40년 | 판관 3, 7-11 | 48년(판관3, 8.10) |
2. 에훗 | 모압/ 8 | 80년 | 판관 3, 12-30 | 98년(판관 3,14.33) |
3. 삼가르 | 필리스틴/ ? | [겹치는 시기?] | 판관 3, 31 | |
4. 드보라와 바락 | 가나안/ 20 | 40년 | 판관 4-5장 | 60년(판관 4, 3; 5, 31) |
5. 기드온 | 미디안/ 7 | 40년 | 판관 6-8장 | 47년(판관 6, 1; 8, 23) |
6. 톨라 | 23년 | 판관 10, 1-2 | 23년(판관 10, 2) | |
7. 야이르 | 23년 | 판관 10, 3-5 | 22년(10, 3) | |
8. 입타 | 암몬/ 18 | 6년 | 판관 10, 6-12, 7 | 24년(판관 10, 8; 12, 7) |
9. 입찬 | 7년 | 판관 12, 8-10 | 7년(판관 12, 9) | |
10. 엘론 | 10년 | 판관 12, 11-12 | 10년(판관 12, 11) | |
11. 압돈 | 8년 | 판관 12, 13-15 | 8년(판관 12, 14) | |
12. 삼손 | 필리스틴/ 40 | 20년 | 판관 13-16장 | 60년(판관 9, 22) |
13. 아비멜렉 | 판관 | 3년(판관 9, 22) | ||
14. 사무엘 | [34년] | |||
총 | 410년 |
5. 에벤에제르 전투 (기원전 11세기 중반)와 사무엘의 사목
1) 에벤에제르 전투
“필리스트아인들은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에게 맞섰다. 싸움이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하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벌판의 전선에서 이스라엘 군사를 사천 명가량이나 죽였다.(1 사무 4,2).”
기원전 11세기 중반에 벌어진 사건들로 인해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가 가나안 땅 패권을 두고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충돌로 “필리스티아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으나 잠시 동안만 유지했으며, 후에는 필리스티아의 억압에 반발하여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극적인 결전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지극히 단편적이며, 설화 형식으로 남겨져 희미한 흔적들만 보여줄 뿐입니다. 중요한 전투는 아펙과 에벤에제르 사이에서 벌어졌지요. 고대의 아펙은 이른바 야르콘(Yarkon)이라 불리는 강의 발원지에 위치해 있으며, 필리스티아의 북쪽 경계 도시가 되었습니다. 에벤에제르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 있지 않지만 실로에서 아펙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목에 위치한 이즈벳 사르타(‘Izbet Sarta) 근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 지파 연맹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고, 실로는 발굴 결과가 알려 주듯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실로가 다시는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언급되지 않는 것과 사울 시대에 실로 사제들의 후손들이 예루살렘 가까운 놉에 정착하게 된 것(1사무 21,1이하), 그리고 이 성읍과 관련된 후기의 암시들(시편78,60; 예레7,12.14; 26,6.9)을 설명해 주고 있지요.
실로에서 전쟁터로 가져왔던 계약 궤는 필리스티아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계약 궤가 이곳저곳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놀라운 이야기는 필리스티아 북부와 경계 지역에 있는 중심 도시들의 삶을 어렴풋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계약 궤는 필리스티아의 에크론에서 유다의 벳 세메스로 반환되었지요. 벳 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추수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팀나 근처의 소렉 골짜기로 삼손이 들판에 여우들을 풀어놓았던 곳입니다(판관 15,1-5). 벳 세메스 사람들은 계약 궤를 키르얏 여아림의 ‘산’으로 옮겼는데(1 사무 7,1; 2 사무 6,3-4 참조), 이곳은 일찍이 히위 족인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로 벤야민의 남쪽 경계이자 이스라엘 북부 지파들의 최남단 경계였습니다(여호 18,15).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기기까지 계약궤는 이곳에 그대로 있는데, 이는 실로를 대신할 예배 중심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극도의 위기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사무엘은 해마다 벤야민과 에프라임 경계에 위치한 지파 및 예배 중심지들을 순회했습니다.
2) 빼앗긴 계약궤의 이동 (기원전 11세기 중반)
“주님의 궤가 필리스티아인들의 지역에 머무른 지 일곱 달이 지났다 (1 사무 6,1).”
3) 사무엘의 에벤에제르 전투 (기원전 11세기 중반)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츠파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필리스티아인들의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소식을 듣고 필리스티아인들을 두려워하였다(1 사무 7,7).”
성경은 사무엘이 이끌었던 또 하나의 에벤에제르 전투에 대하여 전하고 있습니다(1 사무 7,7-14).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미츠파로 모아 단식하며 하느님께 죄를 고백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접근하던 필리스티아군은 참해하여 ‘벳 카르’까지 쫓겨 갔다고 하는데, 그리스어 역본에 따르면 이곳은 ‘벳 호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충돌의 결과로 에크론과 가드 사이의 성읍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권이 회복되면서 브리아 집안이 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1 역대 7,20-24; 8,12-13). 또한 이 지역의 이스라엘 주민과 전에 단 지파에 저항했던 아모리족(판관 1,34-35)과의 관계도 돈독해지게 되었습니다.
4) 사무엘이 순회한 성읍들 (기원전 1040년경)
“그는 해마다 베텔과 길갈과 미츠파를 돌며,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런 다음 자기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와, 거기에서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1 사무엘 7,16-17).”
이어지는 사무엘서 이야기에 따르면 필리스티아의 괴롭힘은 멈춰서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던 것 같습니다. 필리스티아는 에프라임과 마주 보는 벤야민의 도시 게바에 총독을 두어 산악지대에서의 주도권을 재확인했습니다(1사무 10,5 참조; 13,2).
이와 같이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 사이에는 적대 행위와 그에 따른 반발의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의 놀라운 승리가 오히려 필리스티아의 대응을 조금 더 격화시켰을 수도 있지요. 필리스티아는 이제 산악지대에 있는 이스라엘 정착지의 심장부로 침입해 들어와 정복지에 영구 점령군을 배치함으로 자신들의 통치를 확고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