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제국이 다스렸을 때의 유다 지역 즉 예후드라고 불리던 시대에는 아람어가 무역 등 상업에 필요한 공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이집트 등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치루면서 예후드 지방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의 예후드 상황은 어떠했으며,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페르시아 제국/ 예후드 지방
1) 페르시아 제국 (기원전 538-332년)
“크세르크세스 시대의 일이다. 이 크세르크세스는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는 백이십칠 개 주를 다스리고 있었다. (에스 1, 1)”
아케메네스 왕조는 2세기 동안 고대 근동을 지배했습니다. 왕조를 세운 키루스 2세는 아들인 캄비세스(Cambyses)를 바빌론 왕에 임명하여 계승자를 확고히 했습니다. 캄비세스는 이집트 정복에 성공했는데(기원전 525년), 시나이 광야를 지나기 위해 카디테스(Kadytes)에서 이에니소스(Ienysus)에 이르는 해안 지역을 다스리던 아라비아 왕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캄비세스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사촌인 다리우스는 급히 귀국하여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며 왕좌를 차지하려던 이를 죽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520년 즈음에는 바빌론과 그 외 지역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기원전 519년에는 국가 수뇌로 이집트를 공식 방문할 정도를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지요. 그는 또 트라키아(기원전 513년)와 마케도니아(기원전 492년)에서의 전쟁을 통해 페르시아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제국이 20개의 도(道, Satrapy)로 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백이십칠 지방”(에스 1,1)을 정리한 것입니다. 각 도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 그룹으로 구성된 여러 개의 ‘지방’(province)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키메네스 왕조에게는 역사상 중요한 두 가지의 지정학적 사안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서쪽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이집트를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이것과 더불어 지중해 동부에서 패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페니키아 함대에 의존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동안 이집트는 (제27 왕조에서 제30 왕조까지) 기원전 484-483, 463-454년, 404-343년 세 차례에 걸쳐 페르시아에 모반을 했습니다. 이집트는 제31왕조(기원전 338-334년) 통치 아래에서 잠시 재기했으나 곧바로 안렉산드로스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지요(기원전 332년).
또 하나 커져가는 심각한 문제는 지방 태수들이 독립 군주같이 굴거나 때로 황제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처남 또는 매부였던 메가비조스는 정치적인 문제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가 관할하던 ‘강 건너편’ 지역을 자극했습니다(기원전 449년). 또 리디아의 우두머리였던 키루스 왕자는 그리스 용병들의 지원을 받아 왕인 자신의 형을 전복시키려고까지 했습니다(기원전 404년). 소아시아와 레반트 지역 등이 ‘우두머리들의 반란’(기원전 367-362년)에 휘말리면서 제국은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수많은 민족 집단들에게는 언어, 글, 종교 등에 관해 최대한의 문화적 자율성이 허용되었습니다. 페르시아 황제들은 자신들의 제국이 다민족 국가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페르시아의 주요 도시인 페르세폴리스와 수사에서 출토된 부조와 비문들은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2) 예후드 지방 (기원전 440년경)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사로잡아 간 유배자들 가운데 포로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올라온 지방민은 이러하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유다로, 곧 저마다 제 성읍으로 돌아온 이들이다. (느헤 7, 6)”
포로기 이후 귀환한 유다인 공동체는 두 부류로 나뉩니다. 공식적인 아람어 명칭으로 ‘예후드(Yehud)’라는 유다 지방(province) 내에 거주하던 이들과 그 외 지역에 살던 사람들입니다(느헤 4,1 2). 에즈라는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의 온 백성, 곧 유다인들의 하느님 법을 아는 모든 이의 재판을 맡아볼 수 있는 판관들과 행정관을 세우고, 법을 모르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성전 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했지만(에즈 4, 1-3), 느헤미야는 키르얏 아르바(헤브론), 네겝, ‘오노 평지’에 정착한 사람들도 인정했습니다(느헤 11, 25-36). 귀환한 백성들 명단(에즈 2, 1-35; 느헤 7, 6-38)에는 그들이 정착한 여러 성읍들도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일부는 예후드 땅이 아닌 듯합니다. 귀환한 유다인 사회는 이스라엘 백성, 사제들, 레위인(에즈 9,1)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이스라엘 백성에는 유다, 벤야민, 에프라임, 므나쎄 자손들과 실로 사람, 느토파 사람이 포함되었습니다(1 역대 9, 1-16).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 명단에는 여러 지역별 공동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느헤 3장). 이 명단 중에는 ‘~지방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다스리는 성읍의 위치를 ‘예후드’라는 관인(官印)이 발견된 곳의 분포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관인은 북쪽의 미츠파, 동쪽의 예리코, 남쪽의 엔게디, 서쪽의 게제르와 텔 하라짐에서 출토된 단지의 손잡이에 찍혀 있었는데, 이것은 지방 정부에서 포도주 생산업을 운영했음을 의미하며, 이외에 ‘모사(Mozah)’또는 ‘파와(pahwa)’라는 총독 직함이 찍혀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헬라 시대 이후의 정착 양상은 이러한 상황을 확인시켜 주는데, 벳 추르 아래쪽으로는 에돔 곧 이두메아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는 다른 총독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느헤 6, 2-3). 당시 오노 평지는 아닥사스다 2세가 시돈 왕 에쉬무나자르(Eshmunazer)에게 무상으로 불하(공공의 땅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한 땅의 일부로 ‘사론 땅의 곡창 지대인 도르와 요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곳에도 유다인들이 살긴 했지만 예후드 지방이 아니었기에 느헤미야(예후드 총독)의 암살을 도모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였을 것입니다.
2. 지중해 동부 지역의 분쟁들/ 페르시아의 이집트 정복과 잇따른 반란/ ‘강 건너편’ 구역
1) 지중해 동부 지역의 분쟁들: 그리스와의 전쟁
“아테네의 모반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는 {“주피터여, 내가 아테네 인들에게 원수를 갚게 하소서”}라고 외쳤다…. (헤로도토스, 역사 5.105)”
페르시아는 지중해 동부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했습니다. 기원전 498년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인들이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인들이 세운 참주(tyrannos, 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서 볼 수 있던 비합법적 수단으로 지배자가 된 사람. 대개 귀족 출신으로, 평민의 불만을 이용하여, 그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함.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대표적임.)에 맞서 모반을 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이들을 선동한 아테네인들을 징벌하기로 했습니다. 기원전 490년 그가 파견한 소함대가 아티카 해안 북동쪽 마라톤이라는 성읍 근처에 도달했습니다. 아테네 인들은 모든 악조건과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쳤습니다. 다리우스 왕은 복수를 맹세했지만 페르시아 군대가 이곳에 돌아온 것은 10년 후 그가 죽고 그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가 다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다시 한 번 페르시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들은 살라미스 전투에서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막강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했습니다(기원전 480년).
2) 페르시아의 이집트 정복과 잇따른 반란 (기원전 525-484년)
페르시아는 이집트 정복하는데 가장 크게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종종 개입하여 이집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예후드의 유다인들이 그 지역 백성들에게 고발당할 때마다 이집트에서 모반이 일어났습니다. 우연의 일치일 것인지…?
3) ‘강 건너편’ 구역 (기원전 539-332년)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창세 15, 18)”
이집트 시내(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지역(창 15, 18), 곧 팁사에서 가자에 이르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 전 지역, 이곳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통치 구역(satrapy)이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문헌에서 하티 땅 또는 아무르로 나타나는 이곳은 에사르 하똔 시대부터 ‘강 건너편’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문헌에서는 이것이 공식적인 아람어 명칭이 되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최후 왕조가 칼크미스에 있었기 때문에 왕실 비문들에서는 아두라(페르시아어)/아슈라(Ashura, 엘람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 중엽) 등의 그리스인들은 아두라(아시리아)의 축약형인 시리아로 불렸습니다.
이곳은 이집트로 가는 길목이고 페니키아 함대의 본거지로, 지정학상 페르시아에 특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이집트 원정을 갈 때마다 해안을 따라 페니키아 선박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나이 땅을 가로지르는 육로를 이용했습니다. 때로 키프로스 ‘강 건너편’ 구역에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강 건너편’구역 중 해안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북쪽 경계에는 포시데온(바시트, Basit)이, 남쪽 경계에는 이집트의 핵심 국경 성읍으로 세르보니스 호수를 끼고 펠루시움이 있었습니다. 길게 뻗어 있는 해안 지역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시리아인,’ 페니키아인, ‘팔레스타인(필리스 티아) 시리아인’의 땅이었습니다. 가자에서 이집트까지 남은 구간은 다시 ‘시리아인’의 땅이었습니다.
바빌론을 점령한 키루스는 ‘바빌론 강 건너편,’ 곧 칼데아 왕국 전체를 관할할 지방관을 임명했습니다. ‘강 거너편’에는 지방관도 있었는데, 기원전 520년부터 적어도 502년까지는 타트나이(에즈 5, 3.6; 6, 6)가 이 지역을 다스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 건너편’ 지역은 바빌론에서 일어난 엄청난 모반이 무참히 진압된 후 적어도 기원전 482년까지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습니다.
해안을 따라 이집트로 진군해 내려온 캄비세스는 특별한 경제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가자-이에니소스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기원전 525년). 당시 아라비아인들은 아라비아에서 이집트와 지중해 항구로 연결되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케다르족이 분명한데, 이들의 왕 가무스(게셈)의 이름이 이집트 국경 텔 마스쿠타(Tell Mashkhuta)의 아랍 신전에 봉헌된 은 접시 위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집트가 예후드의 유다인들이 고발당할 때 마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타드나이가 즈루빠벨의 성전 재건을 저지하려던 시기(에즈 4, 24-6, 15)인 다리우스 2년,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허가 없이 동전을 주조하고 있었고, 크세르크세스가 즉위하던 해에는 모반을 하였습니다(기원전 486년; 에즈 4, 6). 또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통치 초에는 독립을 선언했습니다(에즈 4, 7-23). 이 모반은 기원전 459년에서 454년까지 곧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매형(또는 처남)이며 ‘강 거너편’의 지방관이었던 메가비조스가 페니키아 함대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삼각주에 도달하여 이집트의 든든한 지원군인 아테네 인들을 물리치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승리를 도운 시돈의 에쉬무나자르에게 도르에서 요빠에 이르는 해안 지역 및 사론 평야의 내륙 곡창 지대를 무상 불하(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넘기는 일. 순화어는 ‘팔아 버림’, ‘매각’)해 주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7년 에즈라는 유다인들을 안정시키고 페르시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로잡아온 이집트 지도자들에게 안전을 약속했던 메가비조스는 태후인 아메스트리스가 이를 어기자 자신의 관할 구역(satrapy)에서 직접 모반을 이끌었습니다(기원전 448-447년). 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온 페르시아 침략군에 이어 바빌론에서 보낸 침략군 역시 물리쳤으나, 결국에는 모반을 멈추고 페르시아로 돌아가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러한 격변의 상황에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 하자 고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에즈 4, 7-23).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허락받아 예루살렘에 온 것은 2년 후입니다(기원전 445년).
성경 이야기는 그 다음 한 세기 반 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 지역에는 역사상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기원전 404년 이집트가 모반에 성공하자 ‘강 건너편’ 도(道, satrapy) 지방관의 사령부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로스 통치 아래에서 ‘시리아’의 중심지는 다마스쿠스였습니다. 시리아의 하위 행정구역들은 전반적으로 아시리아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예후드 외에 성경에는 사마리아, 암몬, 아스돗이 언급되고 있다. 아라비아인 게셈은 남쪽 무역 대상로와 가자 해안 지구를 통제했습니다. 에돔 족이 언제 유다 중앙 산악지대와 네겝에 정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랏과 브에르세바에서 출토된 오스트라카에는 에돔 사람의 이름이 유다인 및 다른 민족의 이름과 함께 아람어로 적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