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순서
- 1. 폴란드 기에트슈바우트 성모 발현 성지 개요
-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3. 기에트슈바우트에서의 성모님 발현
- 4. 기에트슈바우트에서의 성모님 발현 장소
- 5. 성모님 발현 시현자
- 6. 성모님 발현 공인 과정
- 7. 기에트슈바우트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 8. 기에트슈바우트 성모 발현 성지 소개
- 9. 기에트슈바우트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1. 폴란드 기에트슈바우트 성모 발현 성지 개요
기에트슈바우트 성모님 발현 성지는 폴란드 북부 바르미아 지역의 아주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폴란드는 1772년부터 1795년까지 3차에 걸쳐 분할되었습니다. 폴란드의 영토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귀속되며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100년이 지난 뒤 프로이센이 점령한 바르미아 지역은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했고, 강제적인 독일화 정책으로 주민들은 절망과 고통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시자 폴란드는 다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성모님의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발현하신 성모님이 폴란드의 독립과 해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답니다. 수많은 폴란드 국민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고 이 성지를 순례했다고 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대성당)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바사 국왕 지그문트 3세가 1632년에 사망한 이후, 폴란드는 스웨덴과의 전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국력이 서서히 쇠퇴해져 갔습니다. 1769년과 1770년 사이에 오스트리아가 독일계 주민들이 주로 살고 있는 폴란드 남부 지역을 강제로 병합했습니다. 그런데도 폴란드는 이에 대해 어떠한 물리적인 대응도 하지 못했답니다. 이렇게 영토를 강탈당해도 무방비 상태였던 폴란를 놓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1771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폴란드 분할을 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이 세 국가들은 1772년 8월 5일 폴란드 1차 분할 조약을 체결하고 바로 각각 폴란드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영토의 20%를 정도가 분리되어 세 나라의 국토로 편입되었습니다. 1793년에는 폴라드 2차 분할 조약이 체결되어 영토의 60%가 없어져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794년 분할 점령에 대항해 타테우시 코시치우슈코 장군이 러시아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를 진압 한다는 명분으로 폴란드에 진입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1795년 10월 폴란드에 대한 3차 분할을 선포했습니다. 이리하여 폴란드는 영토의 5% 정도만 남았고 나머지는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지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18년에 독립을 하기까지 146년 동안 폴란드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 지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특히 기에트슈바우트가 있는 폴란드 북부를 지배한 프로이센은 1870년부터 반가톨릭 정책과 독일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어떠한 종류의 정치적 활동도 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이렇게 폴란드인들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모님께서 1877년 기에트슈바우트에서 발현하셨던 것입니다.
3. 기에트슈바우트에서의 성모님 발현
1877년 6월 27일 폴란드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기에트슈바우트에 유스티나 샤프린스카(Justyna Szafrynska)는 첫영성체를 하기 위해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본 후 어머니와 함께 성당을 나오다가 단풍나무 위에서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성당 종탑에서 종이 울리고 삼종기도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런데 빛 속에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천사들에 둘러싸여 진주로 장식된 황금 왕좌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다음 날인 6월 28일 유스티나는 신부에게 그녀가 본 사실을 알리고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가 12세가 된 친구 바르바라 사물로프스카(Barbara Samulowska)와 단풍나무 앞에 가서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시 날개 달린 천사와 함께 그 여인이 나타났지요. 여인은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과 거의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머리에 베일이나 왕관은 없었고 긴 머리카락을 아래까지 늘어뜨린 모습으로 단풍나무 위에서 구름을 밟고 서 계셨습니다. 그 후로 발현은 9월 16일까지 거의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타나셔서 82일 동안 160번 이상 발현하셨다고 합니다.
6월 30일: 본당 신부가 지시한 것처럼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나요?”라고 유스티나가 물어보자 여인은 “내가 바라는 것은 묵주기도를 날마다 바치는 것이다. 묵주기도를 바치면 내가 매일 저녁 이곳에 올 것이다.”라고 폴란드어로 대답하셨습니다.
7월 1일: 아이들이 첫영성체를 마친 뒤 단풍나무 아래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여인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유스티나가 “당신은 누구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인 성모 마리아다.”라고 당신의 신분을 밝히셨습니다.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당신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라고 말씀하신 이후 19년 만에 다시 성모님이 기에트슈바우트에 발현하셔서 당신의 신분을 또 ‘원죄 없는 잉태’로 드러내신 것이죠. 유스티나와 바르바라는 그날부터 매일 저녁 묵주기도를 올렸어요. 다른 사람들도 이들과 합류하기 시작하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7월 3일: 아읻르이 성모님께 언제까지 나타나실 것인지를 물었답니다. 성모님은 “나는 두 달동안 여기에 올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 것이며, 병자들이 치유될 것이다. 병자들은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월 6일: 성모님께서 당신의 성상을 만들고, 성당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인 7월 7일에는 성상과 경당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고 지시하셨습니다.
7월 22일: 신자를 비롯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들기 때문에, 교회는 질서를 유지하고, 신심을 위한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아이들은 단풍나무 가까이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순례자들은 성당 광장의 지정된 곳에서만 묵주기도를 하도록 조정했습니다.
7월 28일: “누군가가 거짓 맹세를 하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어 보자 성모님은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으며, 그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은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8월 1일: “버려진 교구에서도 사제를 받을 수 있나요?”라고 묻자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한다면 교회가 박해받지 않을 것이며, 버려진 교구에서도 사제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답을 하셨답니다.
8월 11일: 폴란드 가톨릭 교회가 해방될 것인지를 물어 보니 “그렇다”라고 답을 하셨지요.
9월 8일: 저녁 7시경에 성모님께서는 샘을 축복하셨어요. 그러시면서 “이제 병자들은 치유를 위하여 이 물을 마실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이 샘물은 성사 때마다 사용되었지요. 순례자들이 샘물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9월 16일: 오후 3시경에 14명의 사제와 15,000여 명의 신자들이 야외 경당에서 새로운 성모상을 봉헌하는 예식에 참여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그 때 마지막으로 발현하셨지요. 성모님은 먼저 야외 경당에 배치된 당신 성상을 직접 축복하시고, 이어 은총을 바라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여라.”라고 당부하셨답니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거의 날마다 발현하셨습니다. 위에 기록한 발현 일자는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해주신 날만 선별한 것입니다. 발현은 주로 시현자가 질문을 하면 성모님께서 답변을 해 주신 과정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4. 기에트슈바우트에서의 성모님 발현 장소
기에트슈바우트는 1772년 1차로 영토가 분할되었을 때부터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폴란드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고 절망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은 지 100년이 흘렀지만 시간이 갈수록 억압과 탄압은 더욱 심해져만 갔지요. 이런 고통을 겪고 있던 시기에 폴란드 북부의 작고 가난한 마을 기에트슈바우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겁니다.
시현자들은 성당 앞의 단풍나무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목격했습니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모습을 그린 성화을 볼 때, 뒤쪽에는 성당이 있고 앞에는 성모상을 모신 경당과 큰 단풍나무가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7월 6일에 말씀하셨던 성모님의 성당은 독일 뮌헨에서 만들어져, 9월 12일 기에트슈바우트에 도착했습니다. 1877년 9월 16일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그 자리에 세운 경당에 모시고 봉헌했습니다. 지금은 여기에서 자주 야외 미사가 열린답니다.
(단풍나무 위에 발현하신 성모님)
성당 앞에는 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었지만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단풍나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고 하네요. 그 단풍나무는 야외 경당을 만드는 과정 중에 없어졌답니다. 단풍나무가 서 있던 자리 대신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념석이 놓여있습니다. 기념석에는 ‘1877년 6월 27일부터 9월 16일까지, 여기 있던 단풍나무에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성모상을 모신 경당 아래에는 유리로 볼 수 있는 창이 나 있는데요. 그곳에는 그 단풍나무의 조각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기에트슈바우트를 찾아 오는 순례자들은 주로 이곳에 머물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거듭 요청하신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5. 성모님 발현 시현자
발현하신 성모님을 처음부터 목격했던 주요 시현자들은 유스티나와 바르바라입니다. 유스티나는 매우 겸손하고 조용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바르바라는 영리하고 재능이 많고 활동적이었다고 하네요. 두 소녀는 어머니가 서로 친척이라서 매우 친하게 지냈답니다. 그런데 발현 장면을 그린 성화 속에는 두 소녀와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두 여성 시현자가 더 있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45세의 엘주비에타(Elzbiera Bilitewska)와 23세의 카타지나(Katarzyna Wieczorkowna)입니다. 이 두 시현자는 7월 12일과 13일부터 성모님을 목격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로 유스티나와 바르바라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소녀와 두 여성이 보고 경험한 내용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8월 16일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횟수를 서로 다르게 보고했는데요. 두 소녀는 3번이라고 하고, 엘주비에타는 6번, 카타지나는 4번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어서 두 여성은 의심을 받았고, 가끔씩 시현자로는 언급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두 여성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항상 인내하고 겸손한 태도로 인해 지금은 이들을 포함해서 시현자가 네 명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성당의 내부 벽화에도 성모님 발현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거기에도 시현자가 네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소녀는 발현하신 성모님께 자신들의 미래에 관해 물어 보았다고 하는데요. 성모님은 그들이 수녀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결국 두 소녀들은 기초 과정을 마치고 파리에 있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이 수도회에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1889년 2월 2일에 드디어 수녀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죠. 유스티나는 14년 후 수녀회를 떠났지만 프랑스에서 계속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바르바라는 1895년 과테말라로 선교 활동을 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평생 고아원과 병원에서 봉사하다가, 1950년 12월 85세에 과테말라에서 선종했답니다.
6. 성모님 발현 공인 과정
필리프 크레맨츠 주교는 본당사제에게 성모님 발현과 관련한 자세한 보고를 요청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이 진행되는 중에 발현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조사 위원회를 미리 조직했습니다. 기에트슈바우트에 도착한 조사 위원들은 성모님의 발현 중에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 시현자들의 행동과 상태를 관찰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증언 외에도 순례자와 성직자의 증언까지 조사하여 기록했습니다. 조사 위원회는 시현자인 두 소녀가 매우 정상적으로 행동했고, 어떤 이득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므로 성모님의 발현이 거짓이 아니라고 보고했습니다. 1878년 크레멘츠 주교는 조사 위원회의 보고 결과를 받았습니다. 프란츠 히플러 신부는 연구 내용을 ‘공식 보고에 따른,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기에트슈바우트의 발현’이란 제목으로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출판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가톨릭을 반대하고 박해하는 프로이센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상황이어서 성모님 발현은 강한 반대와 탄압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성모님 발현이 신속하게 공인되지 못했고, 발현 성지가 널리 알려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대성당 내부의 왕관이 봉헌된 성모화)
대성당 제단 위에는 1568년에 그려진 유명한 성모화가 있는데요. 기에트슈바우트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성자를 성자를 안고 계셔서 이 성모화가 게에트슈바우트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상징하게 되었답니다. 성모님 발현 90주년을 1967년 9월 10일에 기념했는데요. 이때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과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이 발현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성모화 속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께 왕관을 봉헌하는 대관식을 거했하였지요. 그리고 로마교황청은 9월 8일을 키에트슈바우트 성모님 발현 축일로 지정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0년 2월 2일에 키에트슈바우트 성당을 대성당으로 승격했습니다. 성모님 발현 100 주년을 맞이해 1977년 9월 11일에는 폴란드 주교회의 주교단과 신자들이 모여 기념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기념 예식 중에 바르미아의 주교 유제프 자스가는 성모님 발현이 신앙과 도덕에 어긋나지 않고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면서 발현에 대한 공인 인정을 선언했습니다. 이 성모 발현지를 공인하는데 특이한 점은 이미 교황이 여러 차례 걸쳐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나서야 주교의 공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성모님 발현 125주년을 맞이해 2002년 6월에 기에트바우슈트에 성모님 발현과 성모님의 보호에 감사를 표시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7. 기에트슈바우트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기에트슈바우트가 위치한 폴란드 북부 바르미아 지역은 1772년 1차 분할 때부터 독일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1870년부터 프로이센의 독일화 정책과 반가톨릭 정책으로 주민들은 고통을 당했고,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지요. 폴란드가 이처럼 힘든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성모님께서 발현하셨고 그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특히 성모님이 폴란드어로 말씀하신 것은 폴란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지요. 또한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강한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82년 9월 27일 본당신부 아우구스틴 바이히젤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이후, 5년 동안의 변화를 정리했습니다. 그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데요. “성모님 발현의 영향이 전국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저의 교구뿐만 아니라 이웃의 모든 교구도 성모님 발현 이후에 더욱 열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점은 모든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방문하고, 꼬박꼬박 성당 미사에 참여하는 것 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으로 생겨난 이러한 의미 있는 결과들이 폴란드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기우바강 주변의 마을에서는 가톨릭 신자 전체가 성당에서 하루에 세 번씩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더 나아가 외인들이 개종하는 경우도 매우 많았습니다. 성모님께서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한다면, 그때에 교회는 박해받지 않게 될 것이고 버려진 교구에서도 사제를 모실 수 있단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폴란드인들에게 올바른 신앙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지요. 더불어 폴란드가 외부 세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도 심어 주셨습니다. 성모님 발현 이후 폴란드가 독립을 바로 이루지는 못했어도 전통적으로 이어진 가톨릭에 대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기에트슈바우트 성모 발현 성지는 유명해 졌습니다. 폴란드 전 지역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8. 기에트슈바우트 성모 발현 성지 소개
기에트슈바우트 성모 발현 성지는 대성당과 야외 경당, 사제관, 순례자의 집, 치유의 샘,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야외 제대가 있는 정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에 지어진 성당은 1352년에 나무로 세워졌습니다. 1500년 3월 31일에 고딕양식의 성당이 세워져 성모님께 봉헌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이후에는 신고딕양식으로 개축하고 증축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성모님 발현 100주년을 맞이한 1977년에는 100여 개의 침상을 갖은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가 착공되어 198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1877년 9월 8일에 성모님께서 샘물을 축복하신 후 그 물을 마신 병자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샘 위에 지팡이로 바위를 내려치는 모세의 모습과 물을 마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새긴 성상을 설치했습니다. 2007년 6월에 십자가의 길이 봉헌되었는데요. 드넓은 초원에 십자가의 길이 각 처마다 잘 조성되어 있어서 기도와 묵상하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대성당에서 기적의 샘물로 이어지는 나무 숲속 길에는 묵주기도를 하면서 걸을 수 있는 ‘묵주기도의 길’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9. 기에트슈바우트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역에서 고속 열차를 이용해 올슈틴(Olsztyn)으로 갑니다. 오스트루다(Ostroda)도 성지와는 멀지 않지만 도시가 작아 성지로 가는 차편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올슈틴까지는 하루 6회 정도 고속열차가 운행 중입니다. 약 3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일반 열차를 타면 소요시간이 대략 6시간 40분 정도가 걸리므로 웬만하면 고속 열차를 이용하시기를 추천합니다. 올슈틴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성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구글에서는 Bazylika Narodznia NMP w Gietrzwaldzie 로 검색해 찾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