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레자이스크 성모 발현 성지 (Leżajsk, 1590)

성모님 발현 성지 중에 폴란드의 레자이스크 성지는 유럽 최초의 공인된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이곳에서 발현하셨을 때의 시대적 배경, 발현 장소, 그리고 발현의 의미 등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폴란드의 레자이스크 성지 소개


레자이스크 성지는 성모님 발현에 대한 공인 제도가 시작된 이래 유럽 최초로 정식 조사를 통해 공인된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17년 이후 루터교를 비롯한 종교개혁파들이 재빠르게 확산되어 가톨릭 교회는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도 예외는 아니었죠. 당시 수도였던 크라쿠프 중심에 위치한 성모 승천 대성당마저도 루터교회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인 혼란으로 폴란드 가톨릭 교회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성모님이 남부의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셨던 겁니다. 1990년도에 성모님 발현 400 주년 기념을 위한 대규모 열려, 폴란드와 다른 나라의 순례자들이 약 25만 명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2. 성모님 발현 시대적 배경

15세기부터 유럽은 국가 사이에 무역이 활발해졌습니다. 따라서 도시가 활성화 되고 서서히 확장되기 시작했지요. 도시가 커지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일자리들이 등장했고, 기존의 직업들이 세분화되고 다양해졌어요.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교가 새로운 직업과 이윤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자 도시에 거주한 사람들은 신교를 추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에는 유럽에 남아 있는 중세 광장 중 두 번째로 큰 광장에 성모 승천 대성당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347년에 건축된 이 고딕양식 대성당은 원래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1536년에는 가톨릭과 루터교회가 동시에 사용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1572년- 1945년까지 거의 400년 동안 루터교회(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루터교임)로 사용되었습니다.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의 중심 광장에 세워진 상징적인 가톨릭 성당이 루터교의 교회로 사용된 것은 참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폴란드 국가는 원래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이죠. 1517년에 시작된 루터교가 20년도 채 안되어 크라쿠프에 퍼져 순식간에 폴란드 남부를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폴란드 국민들뿐만 아니라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자도 이런 사회적, 종교적인 변화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큰 혼란에 빠졌다고 해요. 가톨릭을 포기하고 루터교를 믿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가톨릭을 계속 고수해야 하는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긴급한 상황이었던 거죠. 바로 이 시기에 성모님이 폴란드 남동부에 있는 작은 마을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신 겁니다.

3. 성모님의 발현

1590년,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던 나무꾼 토마시 미하웨크(Tomasz Michalek)는 작은 마을 레자이스크의 북쪽에 있는 숲속(현재 대성당이 있는 곳)에서 강렬한 빛과 함께 성자 예수님을 안고 나타나신 성모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놀라 떨고 있던 토마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이곳을 선택하였고, 여기에서 나의 아들은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에게 전구를 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토마시에게 이 메시지를 교회 당국에 전달하여 교회를 세울 것을 요청하셨지만 토마시는 그저 두려움에 떨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자 성모님은 다시 한번 그에게 나타나셔서, 침묵하지 말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토마시는 자신은 못하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발현해 간청하시라고 요청했어요. 하지만 결국 성모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성모님 발현과 그 메시지를 교회에 증언하였습니다. 

토마시가 이 일을 교회에 보고하자 교회는 믿지 않았다고 해요. 레자이스크는 너무 작은 마을이고, 새 교회를 지을 능력도 없었고, 또한 이미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었던 것이죠. 특히 보좌 사제는 토마시가 거짓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여겨 토마시를 이단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토마시를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가두고 고문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고통을 겪은 후, 토마시는 석방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토마시는 성모님을 만났던 숲속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서, 그 위에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고정시키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라고 부르며 성모님의 발현을 알리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결과로 루테니아 등 주변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순례를 오기 시작했고, 여러 사람들이 은총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보좌 사제는 교회가 조사하고 인정하지 않은 개인 숭배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성모님 발현 사건을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해 토마시의 십자가를 순례자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답니다. 하지만 불이 붙은 십자가는 아무 손상도 입지 않고 불은 바로 꺼졌습니다. 이 현상이 기적으로 받아들여져, 그 십자가는 위대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어요. 지금도 성지의 대성당 안의 유리 경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후, 새로 부임한 사제는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기 위해 작은 목조 경당을 세워 기념했지요. 그런데 순례자들이 계속 늘어나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더 큰 성당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4. 성모님 발현 장소

독일에서 시작한 루터교는 폴란드 남부의 주요 도시인 브로츠와프와 카토비체를 넘어 크라쿠프까지 그 세력을 확장한 후 계속 동쪽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이제 폴란드 동쪽의 큰 도시인 제슈프만 남아 있었는데요. 당시 수도였던 크라쿠프를 비롯해 폴란드의 주요 도시가 모두 체코,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와 인접한 폴란드 남부에 있었으므로, 이 지역이 루터교 세력에 장악되었다는 것은 곧바로 폴란드 전체가 잠식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성모님께서 제슈프 근처의 작은 마을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신 것입니다. 이는 제슈프를 저지선으로 삼아 폴란드 안에서 루터교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가톨릭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지요.

성모님이 발현하신 장소는 레자이스크 북쪽에 있는 큰 숲속의 한 덤블이었다고 합니다. 성모님 발현을 목격 증언한 토마시를 박해했던 보좌 사제는 갑자기 죽었고, 그의 뒤를 이어 교구 소속인 얀 신부가 새로 부임했습니다. 얀 신부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숲속 장소를 “신성한 땅”이라고 선언했습니다. 1598년, 발현을 기념하는 작은 목조 경당을 세워 성모님께 봉헌하였지요. 1606년 프셰미실 교구의 주교는 지그문트 3세 바자 국왕의 지원을 받아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에 큰 성당을 지어 봉헌할 계획 세웠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 건축가가 바로크양식의 성당을 완공해 오늘날에 이르렀지요(1623년).

이런 과정 중에 1608년 베르나르딘(Bernardin) 수도원이 레자이스크로 이전했고, 1610년 수도자들의 노력으로 수도원 안에 벽돌로 만든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성지 서쪽에 위치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광장과 연결되는 북쪽의 넓은 숲속에 그리스도의 수난상이 세워졌지요. 그리고 이곳에 골고타 언덕과 십자가의 길, 성모님의 길, 그리고 병든 이들의 위한 길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5. 성모님 발현 시현자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토마시 미하웨크에 관한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성지 공식 홈페이지와 성당의 게시판에도 그가 레자이스크에 있는 양조장의 직원이고 나무꾼인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만 나와 있지요. 그런데 그의 나이나 출생이나 성장, 노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어떠한 내용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후 감옥에 들어가 고문까지 받았지만, 쉬임없이 북쪽 숲속에서 성모님과 그 메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요. 이런 그의 헌신과 희생으로 성모님이 알려지고 발현 장소가 성지로 선포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없다는 게 상당히 아쉽습니다.


6. 성모화

성모님이 성자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화는 레자이스크 출신인 에라즈마 신부가 1590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성모화는 15세기-16세기 사이의 크라쿠프의 회화를 대표한다고 합니다. 성모화를 비롯해 많은 종교 그림을 그린 에라즈만 신부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있는, ‘인도자’라는 의미의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양식에 따라 성모화를 그렸다고 하는데요. 성화 속의 성모님은 오른손으로 성자를 가리켜 성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아닌 성자에게 주목하도록 하고, 왼쪽 품에 안긴 성자 예수님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은 앞으로 뻗어 축복을 하는 모습입니다.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신 성모님도 성자를 안고 계셨으므로 이 성모화가 발현하신 레자이스크의 성모님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 성모화가 발현 장소에 최초로 세워진 목조 기념 경당에 모셔졌고, 현재의 대성당이 건축된 후에는 성당 안의 경당을 따로 만들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1752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교황 베네딕도 14세가 왕관을 축복하여 레자이스크의 성모화에 봉헌했습니다. 시에라코프스키 주교는 교황이 수여한 왕관을 성모님과 성자의 머리에 씌우는 대관식을 거행했어요. 그런데 1981년 10월 어떤 이가 대성당에 침입해 성화를 훼손하고 성자의 왕관을 훔쳐 가 버렸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지역 교구와 신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속죄 행렬에 참여하고 새로운 왕관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이에 1983년 6월 19일 폴란드 쳉호스트바에서 사목 순방 중이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화에 새로운 왕관과 면류복을 봉헌했습니다. 2002년 성모화 대관식 250주년 기념 행사가 대규모로 진행되었습니다. 


7. 성지로써의 공인 과정


프셰미실 교구의 주교 프스트로콘스키는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는 성당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1630년에 주교 노보드보르스키가 성당을 봉헌했습니다. 후임 주교였던 헨리크 필레이가 성모님 발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 발현이 초자연적인 기적이었음을 확인했지요. 교황 베네딕도 14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화에 왕관과 면류복을 봉헌했습니다. 1928년 7월에 교황 비오 11세는 성당을 준 대성당으로 등급을 올렸답니다. 이는 교황청의 인정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거죠. 


8. 성모 발현의 의미

폴란드 수도 크라쿠프와 남부 지방이 모두 루터교에 의해 장악된 상황 속에서 성모님께서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당을 지으라고 하신 말씀은 단지 건물을 세우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성당을 중심으로 폴란드 안에서 루터교의 확산을 저지하고 가톨릭을 수호하라는 명령이었던 것이죠. 

지그문트 3세 바자는 브레스트 일치(Unit Brestensis)를 주도하고 여러 교회들을 가톨릭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반 종교개혁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596년에 루터교가 점령한 크라쿠프를 포기하고, 가톨릭을 루터교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바르샤바로 수도를 이전하기로 결정했지요. 이는 유럽의 주요한 여러 나라들과 인접해 있고 1038년부터 수도로 자리매김해 온 크라쿠프를 포기하고 변방인 바르샤바로 옮기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라쿠프와 남부의 여러 도시들의 반발을 샀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그문트 3세 바자가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여러 배경들 가운데 성모님 발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그문트 3세 바자는 바르샤바에 왕궁과 성당 등 여러 가지 주요 시설을 세우고, 1611년에 수도 이전을 마치고 바르샤바를 공식 수도로 선포했습니다. 그는 바르샤바에 수많은 가톨릭 성당을 세우고, 스웨덴 등과 같은 루터파 국가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무사하게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자이스크 발현 성지에 성모님 발현 기념 성당과 베르나르딘 수도원을 지을 수 있도록 적극 지원을 하기도 했지요. 16세기 경에 무서운 속도로 확장해 가던 루터교로부터 폴란드와 가톨릭 교회를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레자이스크 발현 성지 소개


성모님 발현 성지는 탄생예고 대성전과 베르나르딘 수도원으로 크게 구분됩니다. 순례자들은 대성당과 주변 광장, 그리고 북쪽 숲을 순례하게 되지요. 시내 쪽과 연결되는 성모님 광장은 성모상을 모신 작은 집과 성모상 기둥이 있으며 야외 미사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광장에서 성지 입구로 들어가 보면 ‘천국의 광장’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교황 바오로 2세가 1964년 크라쿠프 대주교로 임명 받은 다음 해인 1965년 5월에 이곳을 방문한 기념 기둥이 서 있습니다. 천국의 광장에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면 바로 우측에 유명한 성모화가 모셔진 경당이 나옵니다. 대성당 서쪽 출구로 나오면 교황 바오로 2세 광장이 있으며 교황의 동상과 북쪽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이 광장에는 야외 주차장이 있지요. 렌터가를 이용할 경우 이곳에 주차하면 됩니다. 1637년에서 1677년까지 바로크양식으로 건축된 베르나르딘 수도원은 일반 순례자들이 출입할 수는 없지요. 성지의 동쪽에 42개의 객실이 있는 순례자의 집(dompielgrzyma@tlen.pl)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숙박을 하면서 성지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좋을 것입니다.


10. 레자이스크 성지 가는 방법


비행기로 폴란드의 바르샤바 공항에서 제슈프 공항까지 간 후(약 40분 소요), 공항에서 53번 버스를 이용해 제슈프 버스터미널로 갈 수 있습니다(약 20분 소요).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약 1시간 정도 후에 레자이스크역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면 성지가 나옵니다(약 15분 정도 거리). 바르샤바역에서 레자이스크역까지 기차를 이용해 볼 수도 있는데요. 약 6시간 저도 가면 성지에 도착합니다.


11. 레자이스크 주변 성지 소개


1)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폴란드의 이전 수도였던 크라쿠프에는 많은 성당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벨 언덕에 있는 바벨 대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1320년에 착공해 오랜기간 건축 작업이 진행되었고, 수 세기에 걸쳐 폴란드 왕들이 대관식을 올린 곳이지요. 그리고 군주들이 사후에 안치된 장소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젊은 시절에 사목한 성당이기도 합니다. 성당 내부는 매우 화려하고, 황금빛 돔이 씌워진 르네상스양식의 지그문트 경당은 유명합니다. 이 경당에는 지그문트 1세 스타리와 그의 아내의 대리석 석관이 있습니다. 성당의 유명한 것 중 하나는 1520년에 제작된 지그문트 종입니다. 이 종은 크기가 2.7m, 무게는 12.6톤이나 된다고 해요. 또한 높이 4m의 고딕양식으로 만들어진 장식에 위치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검은 예수님 상은 이 성당의 명성을 더 느끼게 해 줍니다.


2) 바도비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생가와 대성당


바도비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태어난 곳입니다. 교황의 세속 이름은 ‘카롤 보이티와’이며, 1978년에 슬라브계로는 최초로, 비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455년 만에 교황에 즉위한 것이지요. 또한 27년간 재임해 34년을 재임한 1대 교황 베드로와 31년간 재임한 교황 비오 9세 다음으로 오랜 기간 재임한 교황입니다. 중앙 광장에는 교황의 생가와 교황이 세례를 받았던 바도베체 대성당이 있습니다. 생가는 현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곳에 방문할 때 반드시 가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 생가와 대성당 사이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대형 동상이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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