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순서
- 1. 프랑스 라 살레트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3. 성모님의 발현
- 4. 라 살레트 성모님 발현 장소
- 5. 라 살레트 성모님 발현 시현자들
- 6. 라 살레트 성모 발현지 공인 과정
- 7. 라 살레트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 8. 라 살레트 발현 성지 소개
- 9. 라 살레트 성지 찾아가는 방법
1. 프랑스 라 살레트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1845년부터 유럽 전체에 기근과 질병이 만연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지방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상태였죠. 이런 시기에 성모님께서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셨습니다. 이때 성모님께서는 죄를 고백하고 악행을 멀리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교황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3개월 후에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비밀 메시지를 받았는데요. 이를 통해 영적인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교황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역대 교황 중 최고였답니다. 결국 비오 9세는 성모님에 대한 성심으로 1854년 12월 무염시태 교의를 공포했습니다.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교황 비오 9세는 1846년 6월 16일 제 255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비오 9세는 역사상 두 번째로 길었던 33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교황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자들은 교황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자 교황이 이탈리아를 배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고는 교황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전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1848년 11월 15일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대를 무장해제 시키고 교황을 바티칸 궁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때 교황 비오 9세는 일반 신부로 변장하고 간신히 로마를 빠져나와 양시칠리아왕국에 있는 가에타로 피신했지요. 그런 후 그에 가담한 관련자들을 전원 파문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 4월 12일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도움으로 간신히 교황청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강성해지면 기존의 사회적, 종교적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철회했습니다. 이런 입장은 이탈리아의 해방운동과는 상반된 행동이었기에 교황과 교황청은 매우 험난한 상황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비오 9세가 교황으로 즉위하고 나서 3개월 뒤에 프랑스의 라 살레트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비밀 메시지가 교황에게 전달 되었지요.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은 비오 9세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지켜주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가톨릭 수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전지역은 1845년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습니다. 프랑스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전보다도 더 힘든 처지에 놓였지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견디어 내야만 했습니다. 이때에 성모님께서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겁니다.
3. 성모님의 발현
1846년 9월 19일에 소를 돌보던 14세 소녀인 멜라니 칼바(Melanie Calva)와 11세 소년 막시맹 지로(Maximin Girard)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토요일 오후 3시경에 가르가스산 중턱의 초원에서 두 아이는 커다란 원형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지고 크기도 커져갔습니다. 그들이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하자 둥그런 빛이 열리면서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은 처음에는 바위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었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들 앞에 일어섰는데, 순백색의 옷을 입고 두 발까지 내려오는, 태양보다 빛나는 노란색 앞치마을 두르고 있었어요. 장미로 만든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는 장미 술리 달린 망토를 걸치고, 두 발에는 흰 신발을 신은 채로 장미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위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양 끝에는 못을 박는 망치와 못을 빼는 펜치가 붙어 있었는데요.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지, 아니면 못을 뺄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여인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는데요. 그 눈물이 아래로 떨어져 여인의 무릎에 닿자 빛을 발산하면서 사라졌답니다. 그래서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고통의 성모님,’ ‘눈물의 성모님’으로 불립니다. 여인은 “내 아이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여기에 왔단다.”라고 하자, 두 아이는 “그런데 당신은 왜 계속 울고 계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세속에 빠져 살고 있어 서러워 울고 있단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여인은 프랑스어로 말하였지만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래서 여인은 프랑스어와 지역 방언을 번갈아 사용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회개하고 통회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고 악행을 멀리하며 하느님과 화해할 것을 요청하셨지요. 이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악행을 저질러 죄를 지으면 기근이 들어 밀이 타 죽고, 포도가 나무에서 시들고, 감자가 땅속에서 썩고, 가축이 역병에 죽고, 일곱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몸을 떨며 부모 풍에서 죽는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인은 아이들에게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를 물으셨어요. 아이들이 열심히는 하지 않는다고 답했지요. 여인은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단다.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이 기도하거라. 시간이 없다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만이라도 바치거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여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두 시현자에게 각각 매우 많은 분량의 비밀 메시지를 전하셨답니다. 특히 멜라니에게는 그리스도의 적과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 등과 미리에 대한 매 긴 종말론(묵시론)을 포함하는 비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비밀로 하되 1858년 이후에는 출판을 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산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간 뒤에 땅 위에서 1미터 정도 공중에 떠서 잠시 그대로 머물다가 빛 속으로 사라지셨습니다. 두 아이는 성모님의 발현을 인근 마을 사람들과 고용주에게 알렸지만 그들은 도무지 믿으려고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현 장소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는 거짓말을 인정하라고 협박도 하고 감에 가두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고용주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주임 신부 루이 페랭에게 전했습니다.
루이 페랭 신부는 발현한 여인의 메시지를 듣고, 그 메시지를 그르노불의 주교 필리베르 드 브뤼야르에게 보고했습니다. 성모님께서 라 살레트의 황량한 산비탈에서 발현하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순례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막시맹의 아버지는 두 달 후에 세례를 받았답니다.
4. 라 살레트 성모님 발현 장소
프랑스는 농업국가로 넓은 평원을 갖고 있는 서부 지역은 어느 정도 생활이 풍요롭고 윤택했습니다. 반면에 알프스가 시작되어 산악으로 이루어진 남동부는 목축업 외에 달리 마땅한 업종이 없어 늘 궁핍했지요. 정세가 불안하거나 전쟁이 나고, 기근이 들면 그 피해를 더 심하게 받는 지역이었습니다.
루이 14세 통치 아래에서 지방 경제가 붕괴했을 때 남동부 지역의 피해는 정말 심각했지요.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매우 비참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1664년 프랑스의 남동부에 위치한 생테티엔르로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845년부터 기근으로 신음하고, 온갖 역병에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성모님께서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겁니다. 따라서 알프스가 시작되는 산악 지역인 생테티엔르로와 라 살레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성모님께서 하실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테티엔르로와 라 살레트는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차로 약 1시간 30분 정도로 달리면 다다를 수 있습니다. 라 살레트는 프랑스 남동부에있는 됫 그르노블에서 남쪽으로 약 80km 정도의 거리에 있고, 알프스의 가르가스산 기슭에 있는 초원 지대입니다.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계셨던 아래에는 샘이 있었습니다. 그 샘은 원래 말라 있어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 발현 이후부터 샘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 하였답니다. 이 샘물을 떠서 어느 한 중증 여성 환자에게 매일 조금씩 마시게 했더니, 9일 후에 그녀는 완전히 낫다고 하네요. 이 외에도 샘물을 마시고 환자들이 치유되는 기적들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이 멀리 퍼지자 나날이 더 많은 순례자들이 이 샘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1847년 9월은 성모님 발현 1주년이 되는 해 였는데요. 수천명에 달하는 순례자들이 모여 노숙하면서 샘물을 마시기 위해 기다렸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에는 앉아서 울고 계신 성모상과 두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시는 성모상이 있고,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기적의 샘이 있습니다. 1852년 5월 25일 브뤼야르 주교는 라 살레트까지 직접 방문해 만 명 이상이 참석한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었던 땅에 성당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1865년에 성당이 완공되었습니다. 1879년 교황 레오 13세는 이 성당을 준 대성당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대성당에는 당시 성모님께서 앉아 계셨던 바위 조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5. 라 살레트 성모님 발현 시현자들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멜라니 칼바와 막시맹 지로는 프랑스의 지방 산골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문맹이었고, 그 지역 사투리밖에 쓰지 못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 처음에는 프랑스 말로 하셨지만 두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자 방언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알려졌지요.
멜라니는 십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당시 지방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구걸을 했다고 합니다. 막시맹도 17개월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계모의 학대를 받고,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때로는 나쁜 일을 공모하거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답니다.
코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아이는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기 전날까지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들은 이웃 마을에 있는 각각 다른 두 명의 농부에 의해 가축을 돌보는 일로 고용 되었습니다. 성모님 발현 이후 이 두 명의 시현자는 엄청난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고 해요. 거칠고 공격적인 질문을 받고, 거짓말쟁이와 사기꾼으로도 몰렸습니다. 또한 투옥이나 파문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성모님이 이들에게 전하신 메시지 내용의 수준이나 분량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문맹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나긴 문장들이나 어려운 용어들, 그 많은 분량의 메시지를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 의심 받을 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모님의 메시지는 간결했다고 하는데요. 데 라 살레트에서의 메시지는 분량도 많고 문장도 상당히 길었습니다. 단 한 번의 짧은 발현이지만 세 시간 동안 성모님께 받은 메시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특이합니다.
데 라 살레트에서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두 아이는 결국 일반적인 성모님 발현의 다른 시현자들보다 더 가혹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도 다른 시현자들에 비해 한층 고달팠다고 합니다. 막시맹은 나이가 들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제가 되겠다는 허세를 부렸습니다. 성모님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며 살다가 40세가 되던해인 1875년에 고향에서 사망했다고 해요.
멜라니는 읽고 쓰기를 배워 1855년 영국 달링턴에 있는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여러 종교 단체의 일원으로 생활하였지요. 1879년 멜라니는 라 살레트에 대한 마지막 원고를 완성해 ‘라 살레트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발현’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성 안니발래 마리아 디 프란치아 신부의 요청으로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의 창설을 돕는 등 시현자로서 걸어야 할 신앙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1904년 멜라니는 이탈리아 알타무라에서 72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그곳에 있는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에 안치되었습니다.
6. 라 살레트 성모 발현지 공인 과정
라 살레트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당신의 신분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으신 거지요. 그러므로 발현 초기 대부분의 자료에서 두 시현자들도 처음에는 어떤 대단한 성녀 정도로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이 감히 성모님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요. 또한 주변 사람들도 그들의 평소 행실을 보아도 성모님이 발현 하신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그들이 평소처럼 거짓말이나 사기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본 것이죠.
하지만 여인이 전해준 메시지를 살펴보면 문맹자인 시현자들이 스스로 조작하여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예언과 묵시적인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기에 성모님이 아니라면 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846년 9월 성모님 발현에 대한 보고를 받은 그르노블의 주교 브뤼야르는 예비 조사를 위해 샹봉 신부와 직원 3명을 파견했지요. 11월에 예비 조사 보고서가 완성되었지만 주교는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1847년 11월에 16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조사위원회가 발현에 대한 1차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이후에도 8번의 전체 회의가 열렸다고 해요. 멜라니와 막시맹도 출석하게 하여 질의와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1848년 6월 26일 성모님 발현과 관련한 최종보고서가 작성되고 교황 비오 9세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1846년 말 성탄절을 전후해 성모님께서 하셨던 모든 예언이 적중했지요. 무서운 질병이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까지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감자가 땅속에서 썩고, 곧이어 옥수수가 썩었지요. 그래서 거의 모든 작물 수확에 실패를 한거죠. 사료를 먹은 가축들이 죽어 나가고,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한 포도나무가 전 지역에서 잔딧물 공격을 받아 말라 죽었습니다. 이어서 아이들이 콜레라에 걸려 수없이 사망하였습니다. 이같은 불행은 전에도 경험하지 못한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었지요. 성모님 발현을 의심하면서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여인이 알려준 예언의 정확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이런 불행한 상황속에서 반비례로 라 살레트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은 오히려 급증해갔습니다.
결국 그르노블의 주교는 성모님께서 라 실레트에서 발현하셨음을 인정했습니다. 1851년 9월 19일, 발현 5주년이 되는 바로 그 해에, 두 어린 목동에게 동정 마리아가 나타나신 것은 진리의 특성을 모두 담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신자들은 틀림없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음을 선언하며 발현을 공인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9월 19일을 축일로 지정했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라 살레트와 인연이 깊었지요. 그는 선종 직전에 그르노블의 주교에게 라 살레트 성모님께 왕관을 봉헌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79년 성지 성당을 준 대성당으로 승격하고, 1888년 신자들 앞에서 라 살레트를 축복했습니다. 또한 교황 비오 12세는 라 살레트 성모님 발현 100주년을 축복했습니다.
7. 라 살레트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1845년부터 유럽 전체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특히 서민들과 하층민들의 주식인 감자와 옥수수의 수확이 어려워지자 지방의 국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죠. 1847년에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프랑스 사람 10만 명을 포함해 유럽에서 거의 1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참한 고통의 상황 속에서 그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은 바로 성모님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 하셔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작은 축복이라도 받고 싶어했지요. 라 살레트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은 성모님의 메시지에 따라 기도하고 통회하면서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851년 7월 3일 그르노블의 주교는 성모님의 비밀 메시지가 교황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시현자들에게 기록하라고 요청했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문맹자들이어서 기록을 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들의 구술을 받아 적어 봉인한 후 두 명의 신부를 통해 1851년 7월 18일 교황에게 전달했습니다. 교황 비오 9세가 이 그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자 교황청의 추기경이 그 발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846년 6월 교황 비오 9세가 교황에 즉위하고 나서 라 실레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과 성모님의 비밀 메시지가 교황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보면, 라 살레트의 성모님이 교황 비오 9세에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용기와 지혜를 주셨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교황 비오 9세는 재임 기간 동안 루르드를 비롯해 공인 받은 성모님 발현을 무려 5번이나 직접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황 비오 9세의 성모님에 대한 공경은 역대 교황들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교황의 강렬한 성모 신심은 1854년 12월에 무염시태를 교의로 선포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입니다.
8. 라 살레트 발현 성지 소개
공인을 받은 성모님 발현 성지는 16곳이 있습니다. 이 성지들 중에서 라 살레트처럼 외진 곳에 있는 성지는 없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작은 마을을 끼고 있거나 마을이 없으면 집이 몇 채라도 있다고 하는데요. 라 살레트는 해발 1,800m 고지에 위치해 있기에 성지에는 오로지 대성당과 순례자를 위한 숙소만 있습니다. 일반 순례자들이 성지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숙박을 하게 되므로 숙박 시설과 부대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다고 하네요. 따라서 하루 당일 방문하는 것 보다는 될 수 있는 한 1박 이상 머무면서 순례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숙소는 성지 공식 홈페이지인 lasalette.cef.fr 에서 예약이 가능합니다.
라 살레트 성지에서는 각종 순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니 참여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성당 옆에 있는 발현 경당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기적의 샘에 가서 샘물도 마셔 보고, 성물방에 성물도 구입해 보면 좋겠지요. 그리고 대성당 정면의 오르막 길로 올라가면 커다란 라 살레트 성모상이 모셔진 다른 작은 경당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성지를 내려다보면 전망이 아주 좋고, 사진 촬영하기에도 좋습니다.
9. 라 살레트 성지 찾아가는 방법
파리에서 테제베를 이용해 그르노블로 이동해(3시간 소요), 역에서 4100번 버스를 타고 성지로 갑니다. 버스는 성수기에만 하루 2회 운행합니다. 버스로는 2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운행을 하는지는 www.transisere.fr 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비성수기에는 역 앞에서 버스로 코르 마을의 나폴레옹 광장까지 이동한 후에 광장에 있는 호텔에 문의해 택시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구글에서는 Sanctuaries Notre Dame de La Saleltte 를 찾아 보고 방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