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순서
- 1. 프랑스 생테티엔르로 성모 발현 성지 개요
-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2. 생테티엔르로에서의 성모님의 발현
- 3. 생테티엔르로 성모님 발현 장소
- 4. 성모님 발현 시현자 브누아트 랑퀴렐
- 5. 생테티엔르로의 성모님 발현 성지 공인 과정
- 6. 성모님 발현의 의미
- 7. 생테티엔르로 발현 성지 소개
- 8. 생테티엔르로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1. 프랑스 생테티엔르로 성모 발현 성지 개요
프랑스의 생테티엔르로 발현성지는 21세기에 들어 르완다의 키베호 성지와 함께 주교의 공인을 받은 성모님 발현 성지인데요. 르완다의 키베흐의 성지는 2001년에 공인을 받았고, 프랑스의 셍테티엔르로 성지는 2008년에 공인되었습니다. 생테티엔르로 성지는 성모님께서 1664년부터 1718년까지 54년 동안 약 2,500여 차레나 발현하신 곳입니다. 이곳은 최고 오랜 시간에 걸쳐, 가장 많이 발현하신 성지인데도 성모님 발현 이후 344년이 지난 후에서야 주교의 공인을 받은 성지랍니다. 성지는 알프스 산 기슭에 위치하여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요. 이탈리아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면서, 산티아고 순례 길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지에 대해 가톨릭 철학자인 장 기통은 “유럽에서 가장 멀리 숨어 있는 성지이지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성지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습니다.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때는 1664-1718년 사이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절대 왕정을 구축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직접 통치 시기인 1661-1718년도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시기의 사회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1643년 5세에 왕이 된 루이 14세는 반란이 일어나 파리에서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고, 반란군의 포로가 되는 등 온갖 정치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1661년에서야 비로소 직접 통치를 하게 되었죠. 재무 대신 콜베르의 큰 활약으로 막대한 재정 수입이 발생하자 수많은 전쟁과 건축을 활발하게 해 프랑스의 전무후무한 영광을 구현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4세 통치 시기의 번영은 콜베르가 1681년에 사망하자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 기근이 들어 흉작이 발생해 국가 재정은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지요. 그리고 루이 14세의 친정 초기의 번영도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었어요. 지방은 수도 파리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함에 따라 지방 경제가 붕괴했습니다. 더욱이 쉴새없는 전쟁과 무거운 세금으로 매우 곤궁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방에는 거렁뱅이들이 나날이 늘어갔고, 굶어 죽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도적들이 나타나 약탈하는 등 범죄가 만연해 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 생활도 당연히 위축되고. 냉담자가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해져갔지요. 이때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인 생테티엔르로에서 성모님께서 무려 54년 동안 발현하신 겁니다.
2. 생테티엔르로에서의 성모님의 발현
1664년 5월 16일에 양을 치며 생계를 이어 가던 17세 소녀 브누아트 랑퀴렐(Benoite Rencurel, 1647-1718)이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산골마을 생테티엔르로 인근의 계곡에서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였습니다.
브느아트는 본당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성모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다고 해요. 5월 초 어느 날, 3세기 순교자 성 마우리티우스가 주교 복장을 하고 나타나, 셍테티엔르로의 푸르 계곡으로 가면 하느님의 어머님을 보게 될 거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양 떼를 데리고 계곡으로 갔어요. 브누아트가 어느 작은 동굴 앞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있을 때 성모님이 성자 예수님을 안고 나타나셨습니다. 브누아트가 “아름다운 여인이여,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저에게 빵이 있는데 같이 나누어 드실래요?”라고 묻자 성모님은 그저 미소만 지으시면서 잠시 서 계시다가 동굴 속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성모님은 이후로 약 4개월 동안 매일 발현하시고, 브누아트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행동과 영적인 삶을 변화시키셨답니다. 또한 그녀에게 미래의 사명을 준비하게 하셨지요. 8월 29일 브누아트가 이름을 물어보니 그 여인은 당신의 신분을 말씀하셨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한 달 후인 9월 말에 성모님은 계곡 반대편에 있는 팽드로라는 곳에서 나타나셔서 브누아트에게 “마을에서 떨어진 곳인 ‘로’에 있는 경당으로 가면 좋은 향기가 날 것이며, 이제 그곳에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성모님이 말씀해 주신 장소로 갔고, 그곳에서 성모님께 봉헌된 작은 경당을 찾을 수 있었지요.
초가지붕으로 된 그 경당은 허름하고 낡았지만 달콤한 향기가 나서 성모님께서 알려 주신 바로 그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누아트가 경당에 들어서자 먼지가 가득한 제단 위로 성모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셨지요. “나는 나의 아들에게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이 장소를 요청하였고, 나의 아들은 나에게 이를 허락하였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기념하여 이고셍 세우는 새 성전은 수많은 죄인을 위한 회개의 장소가 될 것이며, 나는 이곳에 자주 나타날 것이다.” 또한 성모님은 그녀에게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사명과 성당 가까이에 사제들을 위한 피정의 집을 지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브누아트는 성모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성모님의 메시지를 교회 당국에 전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이 주변 지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1665년 봄부터 18개월 동안 13만 명의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자 1665년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느부아트에게 순례자와 사제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 양 떼를 돌보는 일을 중단하라고 하셨습니다.
1669년부터 1689년까지 15년 동안 브누아트는 예수님에 대한 환시를 다섯 차례나 목격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당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나의 딸아, 네가 나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게 하려고 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부터 그녀는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부터 토요일 아침 9시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신비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십자가 고통은 10년 이상 계속되었답니다. 성모님은 1664년 5월 16일에 처음 발현하신 고 1718년 12월 브누아트가 선종할 때까지 54년 동안 2,500번 이상 발현하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같은 지역에서 같은 시현자에게 가장 오랜동안 발현하신 것이고, 발현 횟수도 가장 많은 성지이지요.
3. 생테티엔르로 성모님 발현 장소
생테티엔르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죄인들의 피난처’라고 불립니다. 루이 14세가 직접 통치했던 기간에, 생활이 힘들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지방 주민들이 성모님의 위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알맞은 장소로 프랑스의 알프스가 시작되는 해발 900m에 위치한 ‘로’가 성모님의 발현 장소로 선택된 것입니다. 순례자들이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면 세상을 살면서 받아왔던 고통과 상처를 어느새 다 잊고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께 스며들며 다가가게 만드는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신비로운 장소입니다.
브아누트가 성모님 발현을 처음 교회 당국에 알렸을 때, 앙브룅 교구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여 신자들을 현혹한다고 판단했지요. 그래서 사제들을 보내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조사단으로 파견된 가야르 신부와 랑베르 신부를 비롯한 다른 여러 사제들은 다리 장애로 6년 동안 고통받고 있던 카트린 비알에게 일어난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당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거기에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 기적에 대해 공식 보고서 작성까지 했답니다.
성모님의 발현이 다른 지역까지 퍼지자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알려 주신 낡은 경당은 10명 정도 밖에 수용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방문하기엔 너무 협소했습니다. 이에 따라 더 큰 성당을 건립해야 했습니다. 지역 교구는 1665년 9월 18일, 신자들의 순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수백 명의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새 성당과 사제들을 위한 건물을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이들은 대부분 그 지역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자재를 마련하는 데 걸린 시간만도 1년이었다고 해요. 1666년 10월 7일이 되서서야 초석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순례자들과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냇가에서 돌을 현장까지 날라 왔으며, 물건이나 돈을 봉헌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1669년 드디어 낡은 경당이 자리하던 곳에 새로운 성당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성지의 동쪽으로 1시간 정도 걸어가면 팽드로가 나옵니다. 이곳에 성모님이 브누아트에게 경당의 위치를 할려 주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주는 성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4. 성모님 발현 시현자 브누아트 랑퀴렐
성모님 발현 시현자인 브누아트 랑퀴렐은 1647년 9월 16일 프랑스 남동부의 알프스 기슭에 있는 셍테티엔 다방송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브누아트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고 해요. 그녀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답니다. 근처에 학교가 없어 공부할 수 없었던 그녀는 주일미사 때 신부님 강론을 듣는 것이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어머니를 돕기 위해 12세 때부터 양을 치고, 하루 종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 그녀의 하루일과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17세가 되던 1664년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1666년, 가프에서 온 도미니코회 수도자들과 함께 순례자들을 안내 한 인연으로 도미니코회의 제3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제3회원이 입는 베일과 망토를 입었다고 해요. 성모님 신심이 나날이 더해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브누아트 수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브누아트의 집에서 성지까지는 거리가 멀어 오가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1672년에는 성지 가까이로 이사해 순례자들을 직업 안내하면서 참회와 기도로 신심을 회복하도록 적극 도왔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픈 순례자들에게 성모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성지의 특별한 램프의 성유를 사용해 그들의 몸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교회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하여 오직 주일미사만 참여해야 했던 고통스런 시기를 보내며, 성모님께서 자신에게 54년 동안 계속 발현하시는 것을 감내해야만 했었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성모님 발현을 한 두번만 목격했어도 감당하기 힘들었을텐데요. 그런데 브누아트는 54년간 2,500번 발현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교황들은 그녀를 칭송하고, 이 때문에 주교가 성모님의 발현을 공인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지요.
브누아트는 1718년 12월 주님 성탄 대축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엔 28일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받고 주변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십자가에 입을 맞춘 뒤 71세의 나이에 평화롭게 선종했다고 합니다.
5. 생테티엔르로의 성모님 발현 성지 공인 과정
1665년 9월 18일에 앙브룅 교구는 신자들의 순례를 허락하고 이를 위한 성당과 사제들을 위해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교구는 단지 순례자를 위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지, 성모님의 발현을 공인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성모님의 발현과 브누아트에 대한 교황의 여러 차례 언급과 칭송, 봉헌 등이 있은 후에야 주교는 성모님 발현을 공인하였습니다.
1855년에 교황 비오 9세는 제단에 모신 성모상에 왕관을 봉헌하는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때 약 4만 명의 신자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황은 1872년에 브누아트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했는데요. 그녀가 죽을 때까지 2,500번 이상으로 성모님 발현을 체험했고, 20여 년 이상 죄인들을 위해 영적 지도를 하였기 때문이죠. 1892년에는 성지의 성당이 준 대성당으로 격상했고,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누아트의 시복 시성을 다시 진행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처음 발현하시고 344년이 지난 2008년 5월 4일, 드디어 가프 교구장인 장미셀 디 팔코 주교는 성지의 야외 성전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30명의 추기경 및 주교들과 함께 미사를 집전하면서 성모님의 발현을 공인하였습니다. 이 기념 미사는 TV로 프랑스 전역에에서 방송되었습니다. 2009년 4월 3일,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브누아트의 영웅적인 미덕을 칭송하며 가경자로 선포했습니다. 셍테티엔르로는 찾아가기는 어렵지만 역사적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또한 널리 알려져 있어 이탈리아를 비롯한 주변의 나라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생테티엔르로 성지는 이탈리아 수사에서 출발해서 출발해 프랑스 남부와 아를을 통과해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6. 성모님 발현의 의미
루이 14세가 직접 통치를 시작한 후부터 전쟁을 무리하게 일으키고 여러 정책으로 프랑스의 지방 주민들은 매우 빈곤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최악의 상황에 다다른 것이죠.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피폐해져 믿음을 떠나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한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정말 필요한 시기에 성모님이 발현하신 겁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기념하기 위해 새로운 성당을 지어 수많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은신처가 되게 하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처럼 곤란한 상황에 처지로 내몰린 프랑스 지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로하는 사랑이 담긴 메시지였지요.
성모님 발현 이후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계속 방문하였다는 점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순례를 온 사람들까지도 마음을 모아 새로운 성당을 건축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위로와 행복을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성모님을 찾아가는 그 순례 여정 속에서 바랬던 것 이상으로 충분히 위안과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생테티엔르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죄인들의 피난처,’ 또는 ‘복된 만남의 성모님’이라고도 불립니다.
생테티엔르로는 알프스산맥에 자리해 풍경이 매우 좋은 곳입니다. 성모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피난처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매해 약 17만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답니다. 프랑스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세계 3대 성모님 발현 성지 중 한 곳인 루르드 다음으로 유명한 성지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성지가 산자락에 위해 있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멀리 숨어 있는 성지이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지 중의 한 곳”이라고 가톨릭 철학자인 장 기통은 말했습니다.
7. 생테티엔르로 발현 성지 소개
셍테티엔르로 성모님 발현 성지는 크게 로의 성모 대성당과 야외 성당, 그리고 순례자를 위한 숙소, 주변의 중요한 순례 시설 등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중 야외 성당은 2008년 성모님 발현을 공인 받았던 곳인데요. 지금도 미사를 자주 봉헌하고 있습니다. 성지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숙박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을 위한 숙소와 식당, 카페, 성물방, 회합 장소와 도서관 등을 갖춘 건물이 성지에서 가장 크지요. 생테티엔르로 성지로 순례를 하려면 당일 방문은 쉽지 않으므로 될수 있는 한 하루 이상 숙박을 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성지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성지에서 머물며 그곳에서 제공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순례의 의미를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지 근처에는 브누아트의 집, 그리스도의 성혈 경당, 성모님이 브누아트에게 로를 가리켜 주신 팽드로, 십자가의 길이 있고, 또한 생테티엔르로 마을에는 브누아트가 어릴 때 살았던 집과 세례를 받았던 작은 경당이 위치해 있습니다.
8. 생테티엔르로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파리에서 TGV를 이용해 그르노블로 이동(3시간 소요) 후, 그로노블에서 지역 열차(TER)로 갈아타고, 가프로 이동(2시간 소요)합니다. 가프역에서 렌터카를 사용하거나, 택시, 또는 걸어서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2시간 소요). 택시로 이동할 경우에 왕복 요금을 내야 하므로 비용이 많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글 맵으로는 Sanctuaire Notre Dame du laus를 검색해 찾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