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뤼 뒤 박 (Rue Du Bac, 1830)

순서




1. 프랑스의 파리 뤼 뒤 박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프랑스의 뤼 뒤 박은 성모님 발현 성지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뤼 뒤 박에서의 성모님 발현은 당신의 신분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라고 말씀해 주셔서 무염시태(無染始胎) 교리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 발현의 시대를 여는 첫번째 발현이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성모상이 등장한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에 발현하신 성모님 모습에는 성자를 안으신 모습이었지요. 그리고 레지오 마리애의 수호성인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가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반드시 와야 할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발현입니다. 또한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에 널리 알려진 기적의 메달로 유명합니다. 이 성모님을 목격한 시현자인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성인품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인 배경

1789년 프랑스혁명에 의해 부르봉왕조가 멸망하고 마지막 국왕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면서 부르주아를 포함하는 시민계급이 전격 등장했습니다.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러시아 원정에 실패해 엘바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국가에 의해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다시 부르봉왕조가 들어섰습니다. 왕조시대의 옛제도가 다시 등장해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이 원점이 된 것이었죠. 왕권 체체로 돌아간 왕조는 어느 정도의 권력을 차지한 시민 계급과의 반목과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 국왕은 입헌정치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극단적인 옛제도를 복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반정부 세력이 다수인 의회를 해산하고 출판하는 것도 제한하려고 했지요. 샤를 10세와 부르주아, 시민계급 간의 대립은 날로 악화되어 사회는 극심하게 혼란한 상태로 치달았습니다. 

두 체제의 대립이 고조됨에 따라 프랑스 사회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혁명의 기운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830년 7월 27일에 7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혁명이 발발하기 9일 전인 7월 18일에 발현하셨지요. 이 시기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모님의 메시지를 봐도 프랑스 사회가 가장 위급한 상황 중에 발현하신 거라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양쪽으로 갈라져 가톨릭교회에서도 신자들의 의견이 양분되었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분열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던 터였습니다. 이 역할을 성모님께서 하셨던 것입니다. 


3. 성모님의 발현


1) 첫 번째 발현

1) 첫 번째 발현

성모님의 첫 번째 발현은 ‘사랑의 딸’회의 창립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뱅상 드 폴)의 축일 전날이었던 1830년 7월 18일 밤 11시 30경 수도원 경당에서 일어났습니다. 축일 전야 전례 행사에서 카타리나 라부레(Catherine Laboure) 수련 수녀는 빈첸시오 성인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를 뵐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요청했답니다. 그러고는 그 날 밤에 성모님을 뵐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한 채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 수녀는 잠결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떴는데 침대 옆에 4-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서 있었어요. 하얀 옷을 입은 그 어린아이는 수호천사였던 거지요. “일어나서 경당으로 가세요. 성모님이 당신을 기다리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밤 11시 반이 지나서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할게요.” 그 수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수호천사를 따라 방을 나갔어요. 방 밖의 복도는 온통 환한 불빛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카타리나 수녀가 경당에 도착하자 수호천사가 문을 열어 보니 경당 안은 마치 자정미사를 봉헌할 때처럼 모든 촛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보이지 않았어요. 수호천사가 카타리나를 제대로 이끌었습니다. 그 수녀는 제대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밤 시간을 담당하는 사감에게 들켜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정이 되었을 때, 그녀는 비단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어요. 이어서 성모님이 하얀 겉옷 위에 하얀 베일과 하늘색 망토를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감실 왼쪽에 있는 주임신부 자리에 앉으시자 수호천사가 말했습니다. “여기에 성모님이 계십니다.” 그녀는 일어나 성모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녀는 다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을 성모님의 무릎에 얹었어요. 이는 시현자가 발현하신 성모님의 신체와 접촉한 유일한 경우였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너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길 원하신다. 너는 큰 슬픔에 빠질 것이지만 은총을 입게 될테니 두려워하지 마라. 프랑스에 곧 혼란과 시련이 닥쳐올 것이다. 십자가와 신앙이 모독을 당하고 파리의 대주교가 고통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모님은 구름처럼 사라지셨고, 수호천사는 카타리나를 다시 침실로 데려다 주었어요. 그때 종소리가 울려 새벽 2시인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후에 카타리나 수녀는 그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이었으며,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그녀는 성모님을 만났다는 것과 성모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자신의 고해사제인 알라델 신부에게 모두 전했습니다.


2) 두 번째 발현


성모님의 두 번째 발현은 11월 27일 오후 5시 30경이었습니다. 이 발현도 첫 번째 발현 장소인 경당에서 묵상하고 있을 때 일어났지요.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십자가가 붙어 있는 작은 황금색 지구본을 두 손에 들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는 지구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가 있답니다. 잠시 후 지구본이 사라지고 성모님은 두 손을 아래로 향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손가락에 있는 세 개의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고 해요. 그 빛은 아주 강렬하게 성모님이 밟고 계신 매우 큰 지구본을 비추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 빛은 은총을 구하는 이들에게 베푸는 은총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모님의 발은 녹색 바탕에 노란 점이 있는 뱀의 목과 꼬리를 밟고 계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너(뱀)의 머리에 상처를 입힌다’라는 구절과 연관된 것입니다.


3) 세 번째 발현


1830년 12월 30일, 경당에서 묵상하고 있는 카타리나에게 성모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녀는 제단 뒤에서 옷이 스쳐가는 소리를 듣고 빛을 보았습니다. 이어 제대의 중앙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셨지요. 성모님은 “ 이 빛은 성모님에게 자비를 요청하는 사람을 위한 은총의 빛이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11월 27일에 당부하신 것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셨습니다. 카타리나는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님의 말씀을 다시 전해 주었습니다. 


4. 성모님 발현 장소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을 카타리나 수련수녀가 목격한 경당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본원에 있습니다. 사랑의 딸회는 1633년 11월 29일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성 루이즈 드 마리야크가 파리의 뤼 뒤 박에 세운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하는 담당 수도회입니다. 이 수도회는 여자 수도회로써 초초의 활동 수도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릴 때부터 목동으로 일했어요. 하지만 그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1600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지요. 그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과 고아들을 돕는데 일생을 바치면서 적극적으로 자선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1885년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모든 자선단체와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삼았습니다.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청빈생활과 가난한 이들을 도왔던 것처럼, 빈첸시오 성인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선의 성인이었던 것입니다. 1668년에는 사랑의 딸 수도회가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1813년 사랑의 딸 수도회는 나폴레옹 제국의 법령에 의해 현재 자리잡고 있는 뤼 뒤 박의 땅과 건물의 사용권을 확보했습니다. 2년 후인 1815년 6월 28일부터 이곳을 사랑의 딸 수도회 본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경당은 1815년 8월 6일에 완공되어 봉헌되었습니다. 1815년에 본원의 수녀는 30명이었지만, 500명까ㅣㅈ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849년 경당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856년, 오늘날의 성지에서 볼 수 있는 성모상이 제작되어 세워졌습니다. 

이후 성모상은 몇 차례 이동을 한 후에 1881년 현재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897년 교황 레오 13세의 승인을 받아 성모상 대관식이 거행되었지요. 1930년에 성모님 발현 100주년을 맞이해 내부개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단 위 벽면이 많이 커지고, 그곳에 첫 번째 발현하신 모습이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졌습니다. 2층 상단에 있던 보가 철거되어 개구부가 크게 확대되어 경당이 조금 더 개방되고  빛이 더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3년 후 제단 위 벽면에 오늘날 경댱에서 볼 수 있는 벽화가 다시 그려졌지요. 1980년 경당 전체를 대규모로 복원하고, 경당이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 31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직접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5. 성모님 발현 시현자 

카타리나 수녀는 1806년 5월 2일 프랑스 브르고뉴주에 있는 작은 동네의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열 명의 남매 중 여덟 째로, 9세 때 어머니 마들렌을 여의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읽고 쓰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2세 때 첫영성체를 모신 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1.6km 이상 되는 경당에 가서 미사를 참례했다고 해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단식도 하면서 엄격한 보속도 잘 지켰다고 합니다. 1828년 카타리나가 22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피에르는 너무 신앙 생활에 빠지지 않고 하려고 파리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오빠에게 보냈습니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우연하게 사랑의 딸 수도회라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갔어요. 

그 수도원 응접실에 걸려 있던 어느 노신부의 초상화를 보게 되었는데요. 그녀가 18살 때 꿈에서 본 신부의 모습과 똑같아서, 안내하는 수녀에게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수녀는 사진 속의 노신부는 사랑의 딸회 수도원 창립자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라는 것을 알려 주었어요. 그녀가 꾼 꿈속에서 그 신부는 “너는 나한테 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 꿈이 현실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해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830년 1월 카타리나는 파리 근교 샤티용쉬르센에 있는 사랑의 딸회에 입회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 파리의 뤼 뒤 박에 있는 본원으로 옮겼습니다. 수녀가 된 후에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지요.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다음 해인 1831년 1월 30일에는 정식으로 착복식을 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파리의 외진 곳에 있는 가난한 동네인 뤼 드 뢰이의 엉기앙 호스피스로 가서 46년 동안 가난한 이와 병자, 노인 등을 돌보며 지냈습니다. 1876년 12월 31일 7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고, 유해는 호스피스의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이 체험한 성모님이 발현에 관한 것을 고해신부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성모님이 그녀에게 요구하신 것이었고, 그녀는 이를 죽을 때까지 지키면서 세상이 자신에게 불필요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죠. 1876년 12월 31일 선종할 때까지 그녀가 성모님을 만난 사람이고, 기적의 메달에 관한 메시지를 교회에 전해 준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시현자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1933년에는 시복 시성을 위한 조사를 했는데요. 카타리나 수녀의 유해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해가 전혀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유해는 사람의 딸회 경당에 있는 유리관에 이장되어 현재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카타리나는 1933년 5월 28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7월 2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6. 기적의 메달

카타리나 수녀는 고해신부인 알라델에게 성모님의 발현을 전해 주며 메달을 만들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답니다. 하지만 알라델 신부님은 처음에 수련수녀의 환각으로 생각해 바로 허락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일상만을 관찰했습니다. 1년이 넘도록 카타리나를 지켜본 후에 그녀에 대한 신뢰가 생겨 파리 대교구장인 이아생트 루이 드 겔렝 대주교에게 성모님의 발현과 그 메시지를 알렸습니다. 그런데 시현자인 카타리나의 정체는 말하지 않았다고 해요. 파리 대교구는 1년 이상 가톨릭 신앙에 위배되지는 않는지 정밀한 조사를 벌인 후에 메달 주조를 허락했습니다.  성모님이 보여 주신 메달을 모습을 재현하는 과정을 거친 끝에 1832년 6월 30일 최초의 메달 2천개가 만들어졌습니다.

메달 앞면에는 성모님과 무염시태 기도문이 있고, 뒤면에는 십자가와 영어 알파벳 엠(M)자 문양, 그리고 예수님 성심과 성모님 성심, 12개의 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메달에는 카타리나 수녀가 보았던 모든 것들이 빠짐없이 들어가게 된 것이죠. 1832년 2월 파리에 콜레라가 발생해 이미 2만 여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사랑의 딸회는 콜레라 환자들에게 먼저 메달을 주어, 많은 환자들이 전염병에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1834년에 50만개를 제작했고, 1835년에 100만개, 1839년 1,000만개를 만들어 배포하고, 카타리나 수녀가 선종한 1876년까지 약 10억 개의 메달이 전 세계에 배포되었습니다. 특히 1842년 로마에서 유대인 알퐁스가 이 메달을 목에 걸고 성모님을 목격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 메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 메달의 이름이 처음에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메달, 즉 무염시태 메달이었지만, 수개월 동안 이 메달을 통해 치유과 개종이 일어나면서 점차 ‘기적의 메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기적의 메달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19세기에 기적의 메달은 수백만 명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고, 기적의 메달 전파와 동시에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도 나날이 확산되어 갔습니다. 


7. 성모님 발현 성지 공인 과정

파리 교구에서 가톨릭 신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성모님께서 만들라고 알려주신 메달 주조를 허락했지만, 이것이 성모님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메달 주조 제작이 승인된 후 4년이 지난 1836년에서야 비로소 파리 대주교는 성모님 발현에 관한 정식 조사를 시작하기 위해 조직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조사 위원회는 처음에  카타리나를 직접 면담하면서 조사를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녀는 영적 고해신부 외에는 발현에 관한 사실을 비밀로 하라는 성모님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비밀에 부쳐지기를 바란다면서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그녀의 상황을 잘 하는 알라델 신부도 그녀의 이름을 알리지 말것을 조사 위원회에 간곡히 요청했다고 하네요. 이에 위원회는 카타리나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고해 신부의 의견을 중심으로 발현의 진위를 판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메달이 전파되는 놀라운 속도와 엄청난 제작 수량, 놀랍고도 은혜로운 결과들, 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받은 특별한 은총들은 발현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과 시현자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표시이다.” 

1836년 7월 13일에 파리 교구장은 뤼 뒤 박 성모님의 발현과 기적의 메달 모두를 공인한다고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의 승인은 카타리나에 대한 1933년 교황 비오 11세의 시복과 1947년 교황 비오 12세의 시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뤼 뒤 박 성모님 발현 축일은 카타리나에게 메달을 제작하라고 요청하신 두 번째 발현일인 11월 27일입니다.


8. 뤼 뒤 박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뤼 뒤 박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은 여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가) 뤼 뒤 박의 성모님 발현은 성모님의 발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0여 년 이상 성모님께서 발현하지 않으셨다가, 1830년 후 뤼 뒤 박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죠. 그리고 이후 100여 년동안 발현이 집중적으로 계속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지역 주교의 공인을 포함해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성모님 발현이 총 16건이 됩니다. 이 중에 11건이 100여년 간 일어났으니 성모님 발현 시대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나) 19세기의 유럽은 왕조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아주 혼란스럽고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유럽 전체에 확산되어 이성주의와 자유주의가 득세를 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 등 과학의 발달로 가톨릭교회의 혼란과 분열이 가속화될 위험이 컸던 시기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뤼 뒤 박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성모님의 발현 시대를 열어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이 성모님 중심으로 일치와 단결로 흔들림없이 한 방향을 향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은 항상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가톨릭교회를 수호해 오셨던 것처럼, 이 시기에도 그러하셨던 것이죠. 

다) 성모님께서는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실 때, 당신의 신분을 직접적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곧 무염시태’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때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고, 성모님의 신분을 신앙 생활 속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부터 있어 왔던 무염시태에 관한 교리로까지 확정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24년 후인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하게 되었지요. 이 무염시태 교리를 통해 가톨릭 신자들이 예수님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더욱 성숙해지고 가톨릭 신앙이 고취되었습니다. 

라)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다는 점입니다. 이전의 메시지는 주로 성자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지만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관련된 메시지보다는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을 위로하시는 메시지를 주셨던 것이죠. 성모님은 발현하신 모습 그대로를 표현한 메달을 몸에 지니면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 은총이 수많은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기적의 메달로 신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는 이전의 성모님 발현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는 성모님 시대를 여는 성모님의 새로운 메시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의 메달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메달을 몸에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집이나 각종 모임, 성당에서도 뤼 뒤 박 성모님 상을 모셔두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고 주님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신앙이 확고해졌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도 주모임 때마다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상과 기적의 메달이 새겨져 있는 레지오 군기 백실리움을 제대에 놓고 있습니다.

마) 뤼 뒤 박의 성모님 발현은 완전히 다른 모습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뤼 뒤 박 이전에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 항상 성자 예수님을 안고 나타나셨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성자 없이 홀로 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뤼 뒤 박의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12건의 성모님 발현에서도 모두 성모님 단독으로 발현하셨습니다. 이는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가 예언한 대로 성모님의 시대가 드디어 도래하였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8. 성모님에 대한 진정한 신심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는 레지오 마리애의 수호성인 중 한 분인데요. 이 성인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서 성모님의 발현과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관한 교의 선포로부터 레지오 마리애를 포함한 성모님 군대가 나올 것을 예언했습니다(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p.212). 이는 어쩌면 일련의 과정인 것이었죠.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114절에서 세속과 악마와 부패된 본성과 맞서 대항할 성모님의 군대가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성모님의 군대가 이미 전 세계에 5개 단체가 있다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가) 성모기사회: 1917년 성 막시밀라리아노 마리아 콜베가 창설

나) 레지오 마리애: 1921년 프랭크 더프가 창설

다) 포클라레 운동(마리아 사업회): 1943년 키아라 루빅이 창설

라) 푸른 군대(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1946년 해럴드 콜건이 설립

마) 마리아 사제 운동: 1972년 스테파노 곱비가 시작한 운동

성모님의 시대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성모님의 군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예언과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군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때인가 이미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성모님의 시대가 언제 즈음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이를 파악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성모님의 군대도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했다는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성모님의 군대가 최초로 1917년 이전에 성모님과 관련해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이바로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시대가 시작된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성모님의 시대가 시대가 시작되면서 성모님의 군대도 본격적으로 조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성모님의 군대가 최초로 창설된 때는 1917년인데요. 이전에 성모님과 관련한 최대 사건은 바로 ‘성모님의 발현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830년 뤼 뒤 박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이 성모님 발현 시대의 시작이었죠. 이후 100여 년간 지역 주교의 승인과 교황청의 공인을 받은 성모님 발현히 족히 11건이나 되면서 성모님 발현의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모님 발현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부터 성모님의 군대가 연속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이는 루도비코가 예언한 성모님의 발현과 성모님의 군대가 연결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도 일치합니다. 다시 말하면, 뤼 뒤 박의 성모님 발현은 성모님 발현 시대의 시작이며 또한 성모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9. 뤼 뒤 박 성모님 발현 성지 소개


뤼 뒤 박 성지는 골목길에 있는 초록색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가면 천장이 없는 긴 통로가 나오지요. 먼저 통로 왼쪽에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상이 세워져 있으며, 벽면에는 기적의 메달로 치유와 은총을 받은 사람들의 감사판과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한 소개하는 게시판이 있습니다. 통로의 다른 쪽에는 성물방이 있고, 통로 끝에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경당이 있습니다. 경당의 2층에는 신자석이 있어 경당을 내려다보면서 미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지가 골목길에 위치해 있어서 성지 전체를 조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지에 들어가도 순례할 수 있는 공간이 작지요. 성지에 가면 성물방에 들러 기적의 메달을 구매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무염 시태 성모님이 발현하신 성지에서 무염시태 메달을 직접 구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뤼 뒤 박 성지 공식 홈페이지를 방문해 성지 개방 시간과 미사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10. 뤼 뒤 박 발현 성지를 찾아가는 방법


성지를 찾아가는 쉬운 방법은 파리 최초의 백화점인 르 봉마르세 박화점을 먼저 찾아보는 것입니다. 마르세 백화점의 본관과 별관 사이의 길목길로 들어서면 사라의 딸회의 초록색 문이 나옵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리하게 방문할 수 있지요. 지하철 10호선, 12호선 세브르바빌론(Sevres-Babylone)역에서 하차해 공원 출구로 나가면 정면에 마르셀 백화점 본관이 보입니다. 여기서 대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백화점 별관과 성지로 연결되는 골목길 입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구글에서는 Chapelle Notre Dame Medaille Miraculeuse를 검색해 찾아 갈 수도 있습니다.


11. 뤼 뒤 박 인근 성지 소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관련 성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은 뤼 뒤 박에서 활동했습니다. 1833년 4월 23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도왔던 빈첸시오 신부의 활동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빈첸시오 회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이 수도회는 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이었던 20세의 앙투안 프레데리크 오자남과 그의 동료 학생들에 의해 사랑의 딸 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설립되었습니다. 

빈첸시오회는 오늘날에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빈첸시오회는 경험이 많은 뤼 뒤 박의 사랑의 딸 수도회를 수시로 방문해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고 해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사랑의 딸 수도회의 경험이 필요했을 겁니다. 사랑의 딸 로잘린 랑 뒤 수녀는 빈첸시오회를 여러 면으로 지원하여 초기 빈첸시오회가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913년 빈첸시오회는 오자남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이때 이미 8천 여개의 협의회와 133,000명의 회원이 있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인 아일래드의 프랭크 더프도 바로 같은 해에 빈첸시오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봉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빈첸시오회는 언뜻 수도회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유일무이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였지요. 1845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평신도 단체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르 봉 마르세 백화점에서 180m 정도 대로를 따라 직진으로 가면 왼편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경당이 있고, 경단 제단 위에 빈첸시오 성인이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뤼 뒤 박 성지를 중심으로 500m 안에 오자남의 묘지, 빈첸시오회가 설립된 곳과 빈첸시오회 총 이사회 사무실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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