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께서는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퐁팽에서 발현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발현하신 배경과 이유,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프랑스 퐁맹 발현 성지 개요
- 2. 프랑스 퐁맹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3. 퐁맹에서의 성모님 발현
- 5. 성모님 발현 시현자들
- 6. 퐁맹 발현 성지의 공인 과정
- 7. 퐁맹에서의 성모님 발현 의미
- 8. 벨 에포그: 평화와 번영, 그리고 희망의 시대
- 9. 팽몽 성모님 발현 성지 소개
- 10. 퐁맹 발현 성지 찾아가는 방법
- 11. 퐁맹 발현 성지의 주변 성지 소개: 몽생미셸 수도원
1. 프랑스 퐁맹 발현 성지 개요
나폴레옹 3세의 오만과 판단 착오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871년에 시작된 전쟁인데요.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계속 패배하면서 프랑스 사람들의 오랜 자부심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때 퐁맹과 라발을 비롯한 프랑스 전국에서 국민들이 묵주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결과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라발을 향한 프로이센이 공격이 중단되어 퐁맹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가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를 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단합으로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면서 프로이센 군대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지요. 이후 프랑스는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안정과 번영이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2. 프랑스 퐁맹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일방적으로 승리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이제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870년 7월 14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군사 동원령을 내려, 7월 19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우세했던 프로이센이 8월 4일 프랑스 국경을 넘어와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습니다. 스당 전투에서는 황제인 나폴레옹 3세와 83,000여 명의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프랑스의 군사 동원령에 따라 퐁맹에서도 역시 징집이 이루어졌습니다. 퐁맹 성당의 미셀 게렝 신부는 38명의 징집된 병사에게 고해 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전쟁에서 그들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며 성모님께 전구를 요청했습니다. 프로이센은 1871년 1월에 프랑스 영토의 2/3를 점령했지요. 퐁맹 인근에 있는 대도시 르 망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1월 16일에는 퐁맹에서 40km 떨어진 도시 라발에 도착했습니다. 그 지역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거리는 피난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프랑스인들은 모두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 조국을 구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1871년 1월 17일 라발 교구의 주교도 성모님께 의탁하는 내용의 서약문을 작성해 저녁 6시경 시잔들이 모였을 때 낭독하면서 성모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퐁맹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게서 발현하시는 동안에 라발을 공격하려고 있었던 프로이센의 지휘관인 슈미트 장군은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녁 무렵에 진격을 멈추었지요.
3. 퐁맹에서의 성모님 발현
1) 첫 번째 단계
1871년 1월 17일,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퐁팽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매우 추운 날씨에 폭설까지 내린 저녁 6시경에 12세의 외젠 바르베데트(Eugene Barbedette)와 10세의 조제프 바르베데트(Joseph Barbedette) 형제는 아버지 세자르와 함께 헛간에서 말에게 먹일 건초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이웃인 자네트가 방문해 군대에 징집된 이복형 오귀스트 프리토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어요. 그는 지난 3주일 동안 소식이 없었기에 그들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작업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외젠은 이야기를 듣다가 날씨가 어떠한지 보려고 문으로 가서 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건너편 집의 지붕 6cm 위에서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이 공중에 떠서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가족들을 불러 지붕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네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요. 동생 조제프만이 황금색 별이 새겨진 푸른색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잘못 본 것으로 생각해 다시 헛간으로 가서 작업을 했습니다. 어머니 빅투아르가 헛간에 왔다가 아이들의 말을 듣고 지붕 위를 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성모송 5번을 암송하고 나서 다시 지붕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비탈린 수녀처엄 키가 큰 여인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6시 15분 경에 집에 들어와 저녁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외젠과 조제프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보니 그 시간에도 여인은 여전히 지붕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두 아들의 학교 선생님인 비탈린 수녀를 서둘러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수녀 역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고는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비탈린 수녀가 학교에서 만난 3명의 아이들을 헛간으로 데려와 지붕 위를 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11세의 프랑수아즈 리셰르(Francoise Richer)와 9세의 잔마리 레보세(Jeanne-Marie Lebosse) 만이 두 형제가 말한 것처럼 황금별이 새겨진 짙은 푸른색 옷을 입는 여인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마리아에두아르 수녀가 도착했지만, 그녀 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했지요. 호기심 많은 사람들도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에두아르 수녀는 퐁맹 성당의 게랭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굉장한 발현이 있는 것 같으니 빨리 가보자고 재촉했답니다.
2) 두 번째 단계
마리에두아르 수녀와 게랭신부가 도착했을 때 이미 50명 정도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신부가 기도하자고 제안하자 마리에두아르 수녀와 마을 사람들은 함께 묵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라발 근처를 막 다녀온 동네 주민 조제프 바빈이라는 사람이 “프로이센군이 라발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신부의 지도 아래 모두 ‘마니피캇(Magnificat)’과 ‘순결하신 어머니(Inviolata)’를 반복하면서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는데요. 여인을 감싸는 푸른색 타원형 프레임이 생겨나고, 프레임 안쪽에는 불이 켜지지 않은 4개의 양초가 나타났는데요. 2개는 여인의 어깨 양쪽에, 나머지 2개는 무릎 높이 정도 위치에 나타났답니다. 이어 여인의 왼쪽 가슴에 작고 붉은 십자가가 생겨났지요. 여인의 옷에 새겨진 별들의 수가 증가했고 프레임 밖에 있던 별들이 여인의 발밑으로 모였습니다. 4명의 아이가 40개 정도의 별을 보았어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3개만 보였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퐁맹의 인구는 150명 전후로 추측되는데요. 100명 정도가 함께 모여 있었고, 강추위에도 60명 정도가 헛간에 들어가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여인의 발아래에 높이 1m 정도의 현수막과 같은 흰색 판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천천히 금색으로 한 글자씩 대문자로 쓰이기 시작했답니다.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는 마을 주민들)
첫 번째 문장은 엠(M)자로 시작했는데요. 글자가 쓰여질 때마다 아이들은 큰 소리로 따라 읽었습니다.
“MAIS PRIEZ MES ENFANTS.” (“오, 나의 자녀들아, 기도하여라.”
“DIEU VOUS EXAUCERA EN PEU DE TEMPS.” (“하느님께서 곧 너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MON EILS SE LAISSE TOUCHER.” (“나의 아들이 움직일 것이다.”)
아이들이 읽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곧 전쟁이 끝날 거라는 희망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지붕 위에 있는 여인은 성모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세 번째 단계
사람들이 다시 그 지역의 성가인 ‘희망의 어머니’를 부르자 성모님이 모습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성모님은 매우 슬픈 표정을 지으시고는 공중에 있던 흰색 판과 글자는 사라졌습니다. 성모님은 양손을 펼쳐 어깨 위로 올리시고 성가의 리듬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시면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였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4) 네 번째 단계
사람들이 ‘주님 용서하소서(Parce Domine)’를 부르자 네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의 가슴에 등장한 붉은 십자가를 양손으로 잡고 계셨는데요. 붉은 십자가 위에 있는 작은 읜색 판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성모님 발아래 1개의 별이 나타나 움직이면서 초에 닿자 촛불이 켜졌습니다. 별이 계속 이동하여 4개의 촛불이 모두 켜지고 별은 성모님의 머리 위에 가 위치했습니다. 성모님은 슬픈 표정으로 수난 받으신 붉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한참 동안 바라보셨습니다.
5) 다섯 번째 단계
이제 다섯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에두아르 수녀가 ‘바다의 별이신 성모(Ave Maris Stella)’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의 가슴에 있던 붉은 십자가가 사라지면서 양손을 아래로 내리시자 양쪽 어깨에 희망을 의미하는 흰색 십자가 나타났습니다. 게렝 신부의 지도에 따라 모두 무릎을 꿇고 저녁기도를 시작했습니다. 4개의 촛불이 켜진 상태에서 성모님 발아래부터 커다란 흰색 천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이 올라오자 푸른색 프레임과 4개의 촛불이 사라졌지요. 성모님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보여 주셨습니다. 밤 9시경에 아이들이 침묵하고 있자 성모님이 보이느냐고 물었어요. 아이들은 “아니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났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헛간 외부)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계속 번번이 패배했습니다. 그 결과로 프랑스의 도시와 마을이 함락되고 약탈당하는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지요. 라발도 프로이센의 공격을 받게 되면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또한 라발이 점령당하면 40km 밖에 떨어져 있는 퐁맹도 정복당할 수 밖에 없었어요. 특히 작은 마을인 퐁맹은 요새나 다른 방어 기지 조차도 없었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라발과 퐁맹을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죠.
성모님께서는 바르베데트 가족의 헛간 건너편에 있는 오귀스텡 기드코크의 집 지붕의 6cm 허공에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지붕 사이에 허공에 많은 별이 생겨났고, 두 번째 단계에서 흰색 판이 나타났습니다. 그 판에는 성모님의 메시지가 말이 아닌 글자가 쓰였습니다. 이는 성모님의 메시지가 유일하게 글로 표현된 경우입니다. “나의 아들”이라는 글자가 나타나자 드디어 사람들은 지붕 위에있는 여인이 성모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성모님의 모습은 18세 정도로 보였다고 하는데요. 공중에 떠 계셨고 황금색 별이 새겨진 짙은 푸른색 옷을 입고 계셨지만 허리띠는 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머리에 검은 베일을 쓰시고 그 위에 간호사가 쓰는 간호모자와 같은 단순하게 생긴 황금 왕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왕관 가운데에는 가느다란 붉은 띠가 둘러져 있었으며 황금색 리본이 달린 푸른색 신발을 신고 계셨습니다. 이런 성모님의 복장은 발현하신 성모님 모습 가운데 가장 특이한 복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기드코크의 집 지붕 위에 크지는 않지만 발현하신 성모님 모습과 글이 쓰인 흰색 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헛간 정문을 열고 안에서 밖을 보면 지붕 위에 있는 성모상과 흰색 판이 보입니다. 헛간의 외부 중앙에는 성모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답니다. 성당 내부 앞부분 벽 전체에는 지붕 위에 발현하셨을 상황이 그리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앞양쪽 벽에는 다섯 단계로 변화한 모습의 성모상이 있고, 발현 당시 농기구들도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습니다. 퐁맹을 순레하게 되면 대성당과 이 헛간도 함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헛간에서 나와 왼쪽을 살펴 보면 성당이 또 하나 나옵니다. 이 성당은 외젠과 조제프가 세례를 받은 퐁맹 성당이지요. 발현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그림을 보면 이 성당이 등장합니다. 이 성당과 헛간, 그리고 기드코크의 집 사이의 넓은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지붕을 바라보고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감사와 찬미를 올렸던 것입니다.
5. 성모님 발현 시현자들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들 중에 나이가 어릴 경우에는 발현에 대한 목격 자체가 무시당하거나 의심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시현자들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 않은 것도 일반적이라 할 수 있지요. 탱테티엔르로, 라 살레트, 루르드의경에 성모님 발현을 본 시현자들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몬미의 발현이라는 큰사건을 감당하기에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짓말쟁이라고 욕을 먹거나, 사기꾼으로 몰리고, 감옥에 잡아 넣겠다는 협박까지도 받았습니다. 시현자로 인정받는 것도 어려웠지요. 비록 시현자로 인정을 받아도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만 했답니다.
(성모님 발현 시현자들)
그런데 퐁맹의 발현은 특이하고 예외인 점이 많습니다. 발현이 있는 동안 사제뿐만 아니라 세 명의 수녀도 함께 한 것입니다. 시현자는 항상 발현을 사제에게 전달하고 그 전달이 진실임을 증명하게 위해 표징이나 기적과 같은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루르드의 경우도 베르나데트가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무염시태’라는 메시지를 사제에게 전달한 후에야 시현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퐁맹의 경우 발현 현장에 본당사제인 게랭 신부도 함께 했으며, 그때 일어난 모든 상황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사제에게 발현을 전달하는 과정도 필요없었지요. 외부로부터의 질문도 사제가 담당할 수 있어서 시현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퐁맹의 시현자 4명 가운데 3명은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답게 자신들의 삶을 하느님과 교회에 바치는 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외젠은 신부가 되어, 후에 라발 교구의 여러 본당에서 주임사제로 일했습니다. 동생 조제프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 선교회가 퐁맹 성지를 관리하게 되어 조제프는 성모님의 발현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해 남겼습니다. 잔마리도 보르도 성가정 수녀회에 입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수아즈는 가정부 일을 하고, 여러 작은 시골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했다고 합니다. 1900년부터 외젠 신부의 집안일을 도우다가 시현자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6. 퐁맹 발현 성지의 공인 과정
퐁맹에서의 발현 소식은 주변 지역으로 순식간에 전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순례자들이 헛간으로 몰려와 기도를 했답니다. 3일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랑스 전역에 소식이 퍼졌습니다. 얼마 후 헛간은 성지로 변했고, 헛간 내부 앞쪽에는 기드코크의 집 위에 발현하신 성모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성모님 발현이 있었던 뒤 두 달이 지난 3월부터 라발 교구로부터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조사 위원들이 퐁맹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했던 두 소년은 기꺼운 마음으로 조사에 성실히 응답했습니다. 1년이 지난 후 라발 교구의 주교 카지미르 위카르는 발현 1주년을 축하하면서 조사 결과에 만족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872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퐁맹에서의 성모님 발현과 관련한 특별 교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성모님이 진짜 발현하셨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공인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인 성모님께서 1871년 1월 17일 정말 작은 마을인 퐁맹에서 외젠, 조제프, 프랑수아즈, 잔마리에게 나타나셨다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이 판단을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모든 교회를 통합하는 교황청에 제출합니다.”
성모님 발현 기념 성당 건립은 1873년에 시작되어 1900년에 축성되었습니다. 1905년 2월 21일 교황 비오 10세가 성당을 대성당으로 승격하였는데요. 이는 로마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32년 7월 16일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1939년 교황 비오 12세로 즉위)이 퐁맹의 성모님께 황금 왕관을 봉헌하는 교령을 통과시켰습니다. 2년 후, 1934년 7월 24일 파리 교구의 장 베르디에 추기경이 주교, 사제, 신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성모상에 왕관을 봉헌하였습니다. 퐁맹의 성모님은 퐁맹만 아니라 주변의 라발, 더 나아가 프랑스 전체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희망을 들어주셨으므로, ‘희망의 성모님’으로 불립니다. 발현 11일 후가 되는 1871년 1월 28일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자 퐁맹에서 징집된 38명의 젊은이들은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축일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날짜인 1월 17일로 정하였습니다.
7. 퐁맹에서의 성모님 발현 의미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했습니다. 프랑스 전 국민이 드린 묵주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과 도우심이 없었다면 어쩌면 프랑스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날을 기준으로 전투가 중단되고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요. 이리하여 프랑스로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퐁맹 발현 이후 기적 같은 사건을 경험한 프랑스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프랑스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다시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감히 누가 이길 수 있을까요?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크푸르트조약에 의해 프랑스가 배상금을 모두 갚을 때까지 프로이센군이 프랑스에 주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모두 힘을 모아 배상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들은 기부금을 냈고, 부족한 사람들ㅇ느 금, 은, 구리 등을 닥치는 대로 모아서 배상금을 지불하는데 보탰습니다. 그 결과 불과 1년 8개월만에 전쟁 배상금 50억 프랑을 모두 갚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성과였지요. 프랑스가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프로이센의 수상 오톤 폰 비스마르크는 이소식을 듣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는 결국 영국과 스페인 견제로 하는 수 없이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퐁맹에서 성모님 발현이 있었던 이후 프랑스 국민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난 프랑스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프랑스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참패해 국토의 일부를 빼앗기도 몰락했던 프랑스가 이제 다가오는 평화와 번영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벨 에포크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프랑스는 짧은 시일 내에 그 동안의 혼란과 참혹함에서 벗어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 시대를 펼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1871년 퐁맹에서의 성모님 발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발현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8. 벨 에포그: 평화와 번영, 그리고 희망의 시대
프랑스어로 ‘벨 에포그(Belle Epoque)는 ‘좋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보통 서유럽에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난 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쟁 없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대를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표현을 한다면 ‘태평성대’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사실상 벨 에포크 시대가 지나간 이후 20세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세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까지 연달아 재앙과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19세기 말이 오히려 안정된 시대로 재평가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벨 에포크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시대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근대화에 들어간 시기이고, 미국이 조용하게 힘을 키워 나간 시대이기도 합니다. 벨 에포크 시대를 대개 1870년대부터 1910년대 초반까지 40년 동안으로 보고 있는데요. 더 짧게 본다면 유럽의 기근이 끝난 188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0년까지의 30년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기 동안 프랑스가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유럽 각 나라의 패권을 위한 분쟁과 영토 확보가 완전히 끝났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전쟁과 프로이센과 프랑스전쟁을 하면서 유럽 주요 강대국 간의 국경이 확실하게 정해진 것입니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사이의 영토 쟁탈전이 끝나서 더 이상 전쟁을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두번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입니다. 힘이 막강해진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1871년에서서야 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내부적으로 단합하고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다른 국가에 관심을 쏟는 일이 줄었습니다. 이탈리아도 역시 같은 상황이었지요.
세번째는 유럽 각나라의 국민들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100년 동안 계속된 사회, 정치적 혼란과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유럽 국가들에서 예술과 문화가 급격하게 찬란하게 꽃 피웠습니다. 여러 혁신적인 기술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꽉 차오르고있었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이 등장하고, 전화, 전기, 영화, 철도와 자동차, 비행기, 그리고 지하철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람들의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대부분 이 시대에 만들어지고 보급되었습니다. 또한 사회가 안정되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경제적 상황도 좋아져 생활이 윤택해졌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평화와 번영을 피부로 느낄 만큼 풍요로운 수준이 되었습니다. 문학계의 에밀 졸라, 프루스트, 미술계의 모네, 고흐, 르누아르 등이 이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에펠탑, 호화로운 장식을 대표하는 아르누보 양식, 캉캉춤과 화가 툴루즈로트레크로 유명한 물랭루주 등도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30년 파리 뤼 뒤 박의 성모님 발현 이후 100년 간을 성모님 발현의 시대라고 하는데요. 1830년부터 1846년, 1858년, 1866년, 1871년, 1877년, 1879년에 성모님 발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이 세상과 인간들을 변화시켜, 결국 벨 에포크라는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하신 것이죠. 이후로 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성모님의 발현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가 다시 위기 상황에 놓이자 1917년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다시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9. 팽몽 성모님 발현 성지 소개
퐁맹 성지는 대성당과 옛 퐁맹 성당, 광장, 헛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기드코크의 집 뒤편에 1873년 성지 성당 건축이 시작되어 1900년 10월 15일에 축성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1905년에 대성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08년 9월 추기경 2명과 주교 4명, 신부 600명, 신자 15,000여명이 참석해 퐁맹 의망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란 이름으로 봉헌되었습니다.
대성당 안에 있는 모든 십자가는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들고 계셨던 십자가와 같은 붉은 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대의 뒤쪽 창문에는 발현하신 성모님이 대규모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대규모로 스테인드글라스가 그려진 곳은 퐁맹 성당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푸른색으로 주로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에 해가 비치면 성당 내부는 성모님의 옷과 같은 온통 푸른색 빛으로 가득해 더욱 신비롭습니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발현하실 때 네 번째 단계인 붉은 십자가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대성당 옆에는 사목 센터가 있어 성지 안내를 받을 수 있고 숙박도 가능합니다. 대성당 뒤에도 ‘렐레 르 보카주’라는 대규모 순례자 숙소가 있습니다.
10. 퐁맹 발현 성지 찾아가는 방법
파리 몽 파르나스(Montparnasse)역에서 테제베를 이용해 라발(Laval)이나 렌(Rennes)까지 갈 수 있습니다. 라발역에 내릴 경우에 렌터카를 이용해 퐁맹으로 바로 가면 됩니다. 약 50분 정도 소요됩니다. 렌역에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푸제르(Fougeres)까지 다시 이동합니다. 푸제르에 도착하면 호텔이나 식당에 도움을 청해 택시를 타고 퐁맹으로 갈 수 있습니다.
구글에서는 Sanctuarie de Notre de Pontmain으로 검색해 찾아갈 수 있습니다.
11. 퐁맹 발현 성지의 주변 성지 소개: 몽생미셸 수도원
몽생미셸은 프랑스 북서쪽 노르망디 해변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이 섬에 살고 있는주민은 40여 명이고, 크기는 0.97평방 킬로미터, 둘레는 960m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섬은 매년 350만 여명이 찾아오는 파리 다음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라고 하는데요. 이곳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15m가 되는 이 섬에 수도원이 세워진 것은 1,300년 전 이었습니다.
아브랑슈의 주교 성 오베르는 꿈에서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 이 섬에 수도원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꿈이 단순한 꿈이라고 여겨 무시했지요. 이에 천사가 분노하여 다시 꿈에 나타나 손가락을 내밀어 오베르의 이마를 태웠다고 합니다. 오베르는 꿈에서 깨어나 이마에 생긴 구멍을 확인했지요. 그는 곧장 수도원 공사를 시작해 708년에 완공했습니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는 11세기에 세워진 로마네스크양식의 수도원 성당이 있는데요. 여기에 13세기에 수도자들이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는 고딕양식의 회랑이 추가되었습니다. 성당 지붕 꼭대기에는 대천사 미카엘의 성상이 있는데요. 이는 이 성당이 미카엘 대천사를 기념해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증개축을 계속 해 온 이 도원은 여러 시대의 건축양식이 다양하게 반영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곳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73년 동안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몽생미셸과 직접 연결되는 마을인 라 카제른으로 가기 위해서는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렌행 테제베를 타야합니다. 약 5시간 반 정도가 소요됩니다. 엔역에서 몽생미셸로 가는 105번 버스를 탑승하면 1시간 20분 후에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