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임금(Herod the Great)과 그의 아들들

헤로데 가문은 신.구약 중간사, 특히 신약 배경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테르와 그의 후손들이 예수님 시대 정치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헤로데 가문과 배경

예수님께서 사셨던 기원 후 1세기 초반의 정치적 배경을 말할 때 헤로데 임금 (Herod the Great, 기원전 73년-기원전 4년)과 그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역사 구성이 되지 않을 만큼 그들의 정치사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이스라엘과 고대 유적 중 출중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헤로대 임금의 작품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안토니아 요새, 지중해의 고대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 예리코의 겨울 별장, 마싸다의 궁전들,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헤로디온과 그 외의 많은 요새들의 그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의 유적지들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역사 속의 그에 대한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일화들을 수시로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의 왕권 말기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가 남자 유아들을 학살한 이야기만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지만 (마태 2, 16-18),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뚜렷한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헤로데 가계 인물도

헤로데 임금은 기원전 73년 이두메아의 수도였던 벧 구브린 (또는 마레사)에서 아버지인 안티파테르 2세와 나바테아 여인 키프로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두메아인들은 이전에 나바테아 왕국의 땅에서 살다가 기원전 587년 경 바빌론의 추격으로 요르단 서편 즉 유대아 땅 남쪽으로 건너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34-104년 경 히루카누스 1세에 의해 정복되어 유다교로 개종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이두메아의 행정 장관이었는데 정치적 수완이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기원전 63년) 그는 루비콘 강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해 제거되고 맙니다. 한 때 폼페이우스를 후원 했었던 안티파테르는 마음을 바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하스모니아 가문의 왕 히루카누스 2세를 설득해 이집트의 유다인들도 카이사르를 지지하도록 하여 그가 이집트를 통치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혁명가들의 폭동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지요. 카이사르는 충성스런 안티파테르를 로마 제국에 속한 시리아 관할 지역이 된 유다의 “통치자”와 대사제로 임명했습니다. 안티파테르는 로마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성을 다해 일을 하면서 히루카누스 2세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이용하고 지역세를 받아 마침내 부와 권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안티파테르의 넷째 아들 헤로데는 이런 아버지의 강력한 영향력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합니다. 헤로데는 16살 때 로마로 건너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요. 스물 여섯 살이 되면서 헤로데는 갈릴레아의 통치자로 임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인들과 갈등을 빚어 유다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반란자 히즈키야를 처형한 이유로 로마에 고발을 당해 최고 회의에 소환을 당하지만 그는 오히려 뇌물을 주고 시리아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 지위와 궁전과 많은 영토를 선물로 받습니다. 

로마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유다 왕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에게 살해되자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때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잔치 석상에서 독살을 당하고, 헤로데는 그의 형제 파사엘과 함께 지방 영주로 부임을 받습니다. 동방을 다스리게 된 안토니우스는 통치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헤로데의 충성심과 공물을 노립니다. 헤로데는 로마에 아낌없는 충성을 하고 유다인들에게는 신임을 얻기위해 노력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배층들은 개종한 이방인인 헤로데가 임금으로서 적합한 출신성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헤로데는 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여러 일들을 시도했습니다. 하스모니아 왕가의 공주 미리암네와 결혼을 하고, 성전을 보수 재건축을 했으며 (기원전 18년부터 공사를 시작함), 일반 귀족과 지주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주어 지지세력을 얻고자 했습니다. 헤로데로부터 지위를 획득한 이 귀족 계층들을 ‘헤로데 당원들’이라고 복음서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 22, 6; 마르 3, 6; 12,13). 부자가 된 이들은 흉년이나 가뭄으로 채무를 갚지 못하는 평민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부자들의 횡포를 이기지 못하거나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은 대부분 ‘도둑’이나 ‘무장 강도’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대항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이스카리옷 유다가 가담했던 열혈당원의 전신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율법 학자들이나 지배층 지도자들이 로마 제국과 일반 유다 백성의 의사 소통을 제대로 전달해 주지 못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뿌리 깊은 골이 형성되어 사회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벧 구브린(Bet Guvrin) 또는 마레사 (Maresha)

벧 구브린은 예루살렘과 헤브론 산악 지대와 지중해 평야지대를 이어주는 계곡에 위히찬 쉐펠라에 속하는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남북과 동서 교차로 지점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도시 이름은 마레사로 불립니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마레사는 유다 지파에 할당된 도시들 중의 하나이죠 (여호 15,44). 그리고 유다 왕 르하브암은 바빌론의 침입에 대비해 마레사를 요새화했습니다 (2역대 11, 5-8). 기원전 9세기 초에 에티오피아의 제라가 유다 왕국을 침입해 마레사에서 아사 왕과 접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2 역대 14, 8-10). 제2차 성전이 무너진 후 페르시아 시대에 남동쪽에서 이주해 온 이두메아인들이 마레사와 유다 지방 남쪽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 경 페르시아 말기에는 시돈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마레사에 이주해 살면서 그리스 문화를 전해 주었습니다. 기원전 113/112년 경 하스모니아 왕 요한 히루카누스 1세가 마레사를 정복하고 이 지역의 주민들을 유다교로 개종시킵니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레비우스에 의하면 마레사는 기원전 40년 경 파르티아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합니다. 그 이후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벧 구브린의 이름을 ‘엘레우세로폴리스 (Eleutheropolis)’ 즉 ‘자유의 도시 (the City of Free)’ 란 이름으로 바꿉니다. 비잔틴 시대에 벧 구브린에는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심장부 역할을 하였습니다. 

2. 헤로데와 하스모니아 왕조

하스모니아 왕가의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들 안티고누스는 잃은 권력을 되찾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기원전 40년에 그는 파르티아 임금과 우호조약을 맺고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그는 삼촌 히루카누스의 귀를 잘라 대사제가 되지 못하도록 하고, 헤로데의 형 파사엘은 자결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로데는 자기 가족을 마싸다에 피신을 시키고 자신은 나바테아 (현재 요르단의 페트라 지역)를 통해서 로도스를 거쳐 로마로 도망갑니다. 헤로데를 맞이한 안토니우스는 원로들을 설득해 헤로데가 유다의 왕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왕관을 받은 헤로데는 군대를 이끌고 유다 땅으로 돌아와 안티고누스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기원전 37년 여름, 그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하스모니아 왕조의 미리암네와 결혼을 합니다. 

왕위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했던 헤로데가 사태를 평정하기까지는 거의 5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권력의 회복을 노리는 하스모니아 왕가 사람들의 음모로 인한 공포심으로 반대자들을 끊임없이 처형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자신의 처남 아스토불로스 3세를 죽인 사건입니다. 장모 알렉산드라가 그녀의 아들을 대사제로 삼기 위해 하난엘을 몰아냈습니다. 17세의 젊고 잘생긴 대사제가 초막절에 화려한 예복을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자 모인 군중들이 환호를 하였답니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헤로데는 심복을 불러 그를 살해하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복은 예리코 궁전의 수영장에서 파티를 하는 척 하면서 아리스토불로스 3세를 익사시켰습니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후 옥타비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헤로데는 다시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들을 회복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승승장구하지만 그의 개인 가정 생활은 불운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여동생 살로메를 비롯한 가족들과 왕궁 사람들은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고 서로를 음해하며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음모에 휘말린 헤로데는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측근들을 죽였습니다. 역모가 발생할 경우에 피신하기 위해 여러 *요새들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헤로데 임금의 통치 영역

헤로데는 가장 사랑하는 아름다운 부인 미리암과 그의 장모 알렉산드라를 죽이고, 그의 누이 살로메와 큰 아들 안티파테르의 음모에 속아 미리암과의 사이에서 낳은 그의 아들들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까지 죽였습니다. 그리고 법적 왕의 후계자였던 큰 아들 안티파테르는 왕을 독살하려고 삼촌 페오라스와 계략을 꾸몄고, 이를 엿들은 살로메는 헤로데에게 밀고를 합니다. 헤로데는 죽기 5일 전에 안티파테르마저 처형을 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볼 때 베들레헴에서 ‘유다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동방박사의 소식을 전해 들었던 헤로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마태 2, 1b-3).” 헤로데는 아마 공포심으로 전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베들레헴과 그 지역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베들레헴 지역의 인구가 약 2천 명쯤 되었다고 하는데, 희생된 어린 아이들은 약 20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두 명의 아이(예수님과 세례자 요한)들이 그 학살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폭군도 생명이 다해가고 있었지요. 70세가 된 헤로데는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하고 하는데요. 그는 매독이나 간암과 같은 증세가 온몸에 퍼지자 사해 동편 요르단 지역의 갈리로어 온천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잔인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유다인들도 애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젊은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둔 후 자신이 죽으면 함께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모든 유다 백성이 슬퍼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을 마감한 전제 군주는 아들 아르켈라오스의 장엄한 장례식을 통해 베들레헴 남쪽 헤로디온에 묻혔습니다. 

3. 헤로데 임금의 아들들: 아르켈라오스/ 안티파스/ 필리포스

헤로데 대왕은 35년간 긴 통치를 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다인들은 각기 다른 관점으로 그를 보기 때문에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를 하기란 쉽지 않지요. 복음사가들의 평가와 *역사가들의 평가는 서로 엇갈립니다. 역사가들은 시대와 정치사적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악한 왕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다인들에게 안정과 윤택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비유다인들도 억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격적으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쉽게 격정에 타올랐고, 정의를 경멸한 사람이었다. 왕위를 잃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적이나 가족들에게 야비하고 잔인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는 병상에서 사마리아 여인 말다케에게서 난 아들 아르켈라오스와 안티파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에게서 난 아들 필리포스 2세에게 왕국을 분할해 줍니다 (요세푸스 플레비우스, 유대 고대사 17월 7-8장). 

가계 인물도

헤로데가 아르켈라오스에게 정권을 넘겨 줄 시기에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것입니다. 헤로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과월절 축제에 모였던 순례자들은 기뻐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헤로데가 세웠던 금 독수리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러 왔다가 이를 목격했던 아르켈라오스는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리 군대를 출동시켜 약 3천 여명의 사람을 학살해 거리를 피로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돌아 온 성가족은 이 소식을 듣고 아르켈라오스를 두려워해 나자렛으로 가서 살았을 것이다(마태 2,11). 이렇게 잔악한 일로 시작한 아르켈라오스는 그 포악함을 계속 드러냈습니다. 그는 백성의 민심이라 민생을 돌보지 않고 그의 잔혹한 방식대로 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수석 사제 둘을 파면시키고 사제직을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파토키아를 방문했을 때 그의 이복 형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이며 세 아이의 어머니인 글라피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을 했습니다. 이것은 유다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유다인들의 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요. 그가 로마로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떠나자 나라는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점입가경으로 갈릴레아에서 헤로데에게 처형을 당했던 히즈키야의 아들 유다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많은 군중이 몰려 들어 로마 군사와 대치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유다를 다스리던 시리아 총독 바루스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면서 자신이 지나는 모든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2천 여명의 반란자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탄원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르켈라오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계승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그를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잔인성과 악함으로 인해 아우구스투스는결국 그를 관직에서 박탈하고 제거합니다 (기원후 6년). 아르켈라오스와는 다르게 안티파스와 필리포스는 성공적으로 통치를 하였습니다. 안티파스는 데카폴리스에서 분리된 갈릴에아와 베레아를 분할 통치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사치스럽고 또한 통치하는 방법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복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여러번 책망을 받고, 군중들이 그이 회개 선포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자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그를 죽이고 맙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그를 “모든 악해에 한 가지를 더 보탠” 인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루카3, 1-20; 마태 14, 3-4; 마르 6, 17-18). 그리고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나서 안티파스의 관할에 속했음을 보고 안티파스 앞에 서서 어떤 기적이라도 베풀라고 강요를 받으시고, 조롱을 받으십니다 (루카 23, 7-15). 

들들의 통치 지역

안티파스는 헤로데 임금이 죽고 난 후 혼란시기에 로마 군에 의해 무너졌던 세포리스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과 화친 정책을 통해 베레아 국경의 안전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갈릴레아 호숫가에 도시를 세우고 도시의 이름을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티베리야스’라고 명명했지요 (기원후 18년). 이 이후로 갈릴레아의 수도는 세포리스에서 티베리야스로 옮겨갑니다.

아그리빠 헤로데 1세가 유다 지역의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자신의 남편인 안티파스가 갈리레아의 영주로 있다는 것이 헤로디아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안티파스를 설득해 로마로 가서 황제로부터 자신도 왕의 직위를 얻어오라고 부추겼습니다. 영주로서 만족하면서 살고 있었던 안티파스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헤로디아의 성화에 결국 로마 행을 택합니다. 로마 왕제 칼리굴라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지만 황제는 안티파스를 왕으로 임명하기느 커녕 그를 해임시키고 골 (Gaul, 현재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지역)로 유배를 보내 마침내 죽이고 맙니다(기원후 37년). 헤로디아는 자신 개인 소유의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그녀는 남편과 같이 유배를 가서 의리를 지킨다.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지역도 아그리빠에게 넘어가 다시 한번 그들에게 모욕이 되었습니다. 

헤로데 필리포스는 헤로데 왕국의 북쪽 현재 골란 고원 지역을 상속 받았습니다. 그의 땅에는 유다인들보다 헬라, 시리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ㅂ려로 충돌을 하지 않고 온화한 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좋은 지도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건축가여서 카이사리아 필리피(바니야스, 마태 16, 13-20)라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처럼 야망과 포악함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30년 간 성공적으로 통치를 했습니다. 

*역사가 니꼴라오스

다마스커스 출신 니꼴라오스 (Nicolaus of Damascus, 기원전 64년경 출생)는 헤로데 왕 (Herod the Great)의 절친한 친구이자 상담자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헤로데 왕은 정치적으로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헤로데 왕이 죽고 난 뒤 유다인들이 아르켈라오스를 원하지 않았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 앞에서 아르켈라오스를 위한 변호를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헤로데 왕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유대 고대사 17권 11,3). 

4. 헤로데 임금의 손자들

1) 헤로데 아그리빠 1세

헤로데 왕은 하스모니아 왕 히루카누스 2세의 손녀였던 미리암 1와 결혼했습니다 (기원전 29년). 이들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였습니다. 사실 이 두 왕자는 어머니를 통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므로 헤로데 왕의 후계자로서 적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 대왕과 도리스 사이에서 난 실제적인 장자였던 안티파테르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미리암이 죽임을 당하고 난 후 이 두 왕자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계속 꾸미며 그들을 모함했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누군가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주변 인물을 숙청해 왔던 헤로데는 결국 안티파테르와 여동생 살로메의 음모에 속아 이 두 아들을 처형하고 맙니다 (기원전 7년). 

헤로데 아그리빠 1세

헤로데 아그리빠 1세는 헤로데 대왕에게 처형을 당했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와 베르니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그리빠 1세는 본래 정신적으로 고상했고 (타고난 귀족처럼 고상했다고 함), 남에게 주는 것을 아낄 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절제하도록 지도하던 어머니 베르니케가 죽은 후 그 성격이 더욱 드러나 그는 돈을 마구 쓰면서 사치를 부렸으며 남에서 마음껏 선심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는데 비용을 많이 들였는데, 이는 그들의 협조를 받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보장받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하고 유다 땅으로 돌아온 그는 가난에 시달려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빚쟁이들의 성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가중되는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려 다급한 상황에 몰려 그는 이두메아에 있는 말라타 (Maltha)의 한 망대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살을 결심하였지만 아내 키프로스가 이를 알고 자살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분봉왕 필리포스의 아내이며 아그리빠 1세의 누이 헤로디아에게 그의 처지를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필리포스와 헤로디아의 도움으로 아그리빠는 티베리우스의 재정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재정 지원이 무색하게도 그는 사치로 재산을 탕진하는 등 그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티로의 한 파티 석상에서 누이의 남편 필리포스에게 모욕을 당하고 나서 시리아의 총독이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플라쿠스 (로마의 집정관이었으며 시리아의 통치자, 기원후 32-35)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처음에는 플라쿠스의 도움으로 함께 살았지만 아그리빠는 그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궁지에 몰려 결국은 톨레마이스로 갔습니다. 채무를 갚지 못해 신용이 말이 아니었고, 돈이 없어 계속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야 했던 아그리빠는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키프로스의 도움으로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치듯이 피신을 했습니다.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장차 황제가 될 카이우스 칼리굴라의 환심을 사서 그의 막강한  측근이 되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아그리빠는 필리포스의 옛 영토의 왕으로 추대를 받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는데요. 아그리빠는 칼리굴라 황제로부터 큰 *금사슬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리굴라는 그에게 왕의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리굴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기원후 41년 1월). 

그 당시 로마에 머물고 있었던 아그리빠는 클라우디우스 (사도 11, 28)의 옹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클라우디우스는 헤로데 대왕의 모든 영역을 아그리빠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유다는 45년 만에 다시 통일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상을 성전에 세우기를 강요했던 칼리굴라가 죽었을 때 유다인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칼리굴라와는 달리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유다인 공동체에 그들의 권리를 재확인시켜 주면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헤로데 대왕 이래 예루살렘의 경계는 북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성벽을 건설하기 위해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유다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건축 활동을 중단시켰습니다. 아그리빠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였고 바리사이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유다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달려 갔고 심지어는 자신의 영지 밖에서도 유다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아그리빠를 온순하고 정의로운 지도자로 존경했습니다. 아그리빠도 다른 지도자들처럼 대사제를 세 번씩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사형에 처하고, 교회의 지도자를 죽이고, 심지어는 베드로를 감옥에 잡아 두었습니다(사도 12, 1-17. 기원후 44년 과월절이라고 함). 이런 아그리빠의 통치는 3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연설이 루카 복음사가와 역사가인 유세푸스 플레비우스에 의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플레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아그리빠 왕은 순은으로 짜인 참으로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으로 들어 갔다. 태양 광선이 찬란하게 비치자 은으로 짜인 그 곳은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반짝임에 의해 그것을 바라 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아첨꾼들은 왕에게는 유익하지 않았지만 아그리빠 왕을 신이라고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유대 고대사 19권 8장).” 

그러나 그는 연설을 마치고 난 후 복통으로 5일 간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탈진해갔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5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기원후 44년).유다인들은 슬픔과 비탄에 잠겨 왕을 위해 기도를 하면서 그가 회복되기를 소망했지만 허사였지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일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보았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했기 때문일 겁니다. 

“… 그 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이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 (사도 12, 22-23).” 

2) 헤로데 아그리빠 2세

아그리빠에게는 16세가 된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아그리빠 2세로 불립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가 유다를 통치하기에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여 유다와 갈릴래아 지역을 로마의 직할 통치로 환원시키고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래아 지역은 처음으로 로마 총독의 수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헤로데 아그리빠 2세

독립성이 강한 갈릴래아 사람들을 로마의 속주에 편입시킨 것은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가뭄으로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간절해졌고, 열혈당원은 대중적 인기를 더해갔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성전에서 보인 로마군들의 신성 모독 행위는 유다인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 시켰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기 전의 유다, 갈릴래아 지역은 그야말로 폭풍 전야와 같은 분위기였을 겁니다. 갈릴래아 지역에서부터 로마군들에 대항하여 싸우다 패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피신하고 그들은 성전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습니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안토니아 요새를 무너뜨리고 성전을 점거하면서 반란자들을 죽이고 성전을 불태운 다음 성전의 기물을 전리품 삼아 로마로 가져갔습니다 (기원후 70년 아브월 9일, 태양력으로 7-8월 경). 

지금까지 헤로데 왕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기원전 67년 로마 폼페이 장군의 예루살렘 성전산 점령과 동시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테르의 활약에서부터 헤로데의 손자 아그리빠와 성전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간의 유다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제 2성전 시대 (기원전 515년-기원후 70)에서의 이 100여 년간의시기는 격동기였고, 가장 고단하고 복잡하며 혼란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헤로데 왕가가 다스렸던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갈릴래아 지역을 배경으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한 정점에서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온 몸으로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지정학적인 이유로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시달림과 착취를 당했을 민중들의  고통이 얼마나 컷을까요. 그래서 메시아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극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이때에 때가 이르자 세상에 친히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너무나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가득하며 거짓과 불의와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참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던 그분…!

역사는 항상 돌고 돈다는 역사가 토인비의 말처럼 2000년이 지난 오늘 날 우리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에 살고 있지 않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때에 그들을 위로하시며 희망과 위로를 주신 사랑 가득하신 그분의 음성을 우리는 지금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그분은 아실 겁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