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1: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정복 이야기

헬레니즘 시대는 마케도니아 출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동방에서 봉우리를 틔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시기의 유대아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와 후기 원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알렉산드로스의 티로 공격

“… 그때에 숫염소 한 마리가 서쪽에서 오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온 세상을 가로지르며 오는 것이었다. 그 숫염소의 두 눈 사이에는 당당한 뿔 하나가 나 있었다. (다니 8,5)”

알렉산드로스의 티로 공격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3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기원전 480년에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공해 온 경로를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엘레오스에서 다르다넬레스(Dardanelles)해협을 건넌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를 다스리는 페르시아 지방관들과 첫 전투를 벌였고, 그라니코스(Granicus) 강둑에서 그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군사령관 파르메니오(Parmenio)에게 다스킬리움에 있는 왕실 보물을 확보하라고 명령한 후, 자신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여, 사르디스를 함락시켰고, 계속해서 밀레토스와 할리카르나소스를 포위한 후 이오니아의 해안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강력한 페르시아 해군이 해안 성읍을 공격했지만 카리아와 리키아로 진격하는 알렉산드로스를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팜필리아의 시데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적의 중심부인 아스펜도스와 사갈라소스로 향하였습니다. 그는 사갈라소스를 기습, 점령한 후 프리시아의 고도인 고르디움에 도달했고, 계속해서 앙키라로 나아갔습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가 아시리아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르디스에서 온 파르메니오군과 고르디움에서 합류한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타우로스 산맥의 협소한 킬리키아 관문을 아무런 저항없이 지나 킬리키아의 수도인 타르소스에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기에서 솔리에 도달할 때까지 킬리키아 산악지대 토벌에 나섰습니다. 그는 이 지역의 모든 저항 세력을 물리친 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아마누스 산맥을 관통하는 시리아 관문을 지나 미리안드로스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다리우스와 그의 군대가 자신의 후방인 이소스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급하게 돌아가 과감하게 기병대로 공격을 하여(기원전 333년) 다리우스를 물리쳤고, 다리우스는 가족과 보물을 버려두고 달아났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추격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페니키아의 도시들을 공격, 정복했습니다. 페니키아 함대가 페르시아에 충성하는 한 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마케도니아로부터 고립시키거나 그리스 도시들을 선동하여 모반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라도스, 시돈, 비를로스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항복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해안을 따라 티로를 향해 전진했고, 그동안 파르메니오는 다마스쿠스로 가서 왕실 보물을 강탈했습니다. 티로는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이자 지중해 무역에서 그리스 최고 경쟁자였지요. 이 도시는 해안에서 떨어진 섬에 위치해 있다는 것과 식민지인 카르타고의 도움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일곱 달 동안 티로와 싸우면서 섬과 해안을 연결하는 방파제를 완공했습니다. 티로 함대는 패배했고, 기원전 332년 7월 티로는 함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알렉산드로스가 혁혁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군대 중에서 주로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전술이 뛰어났고, 그 자신의 전략도 탁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과 더 큰 공을 세우도록 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반면에 다리우스 1세 시대에 강력했던 페르시아는 현재 유약한 지도자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페르시아 군 중에서도 그리스 용병들만이 용맹함과 군사적 역량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 초기에 페르시아의 행정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지방관을 페르시아인 대신 마케도니아인으로 바꾸기만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심지어 페르시아인을 고위직에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2. 팔레스타인에 온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의 후기 원정

1) 팔레스타인에 이른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32-331년)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 (1 마카마카 1,1-2)”

팔레스타인에 이른 알렉산드로스

티로 정복 후 알렉산드로스는 해안을 따라 이집트로 진군했습니다. 그가 아직 티로를 포위를 하고 있을 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대표들이 도착하여 평화적인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마리아 지방관 산발랏과 8,000명의 군사가 알렉산드로스에게 합류했지만, 그는 이런 식의 증원 병력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일부 저항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를 레바논 산맥으로 보내어 반란을 일으킨 민족들을 진압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북부에 있는 왕의 요새 아코는 무력 충돌 없이 항복했고, 알렉산드로스 군은 주로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스트라토 망대(현재 지중해의 카이사리아)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분명 이곳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했을 텐데, 당시 이곳 해안 지역이 온통 습지와 모래 언덕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케도니아 군은 아마도 로드에서 다시 해안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서 아소도와 아스클론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요새 도시인 가자의 사령관 바티스(Batis)는 아랍 용병을 믿고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한번 더 포위하며 공격했습니다. 가자 주민들과 나바테아 동맹군은 그리스인 경쟁자들이 이 중요한 항구 도시 곧 지중해의 무역로를 점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기원전 332년 9월 알렉산드로스는 토루(흙으로 만든 보루)와 티로에서 가져온 공성 기구를 사용하여 두 달의 포위 끝에 가자를 점령했습니다. 사로잡힌 남자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어요. 빈 도시에는 주변 지역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지요. 포위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그리스 기병대는 나바테아로 진격했는데, 이두메아 지역의 수도인 라키스에도 군대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자 정복으로 이집트로 가기 위해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자에서 기원전 332-331년의 겨울의 보냈습니다. 그는 티로로 돌아가면서 다시 한 번 팔레스타인을 종단했는데,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전승이 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에 대한 사마리아의 충성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곳 주민들은 지방관인 안드로마코스(Andromachus)에게 반기를 들고일어나 그를 산 채로 태워 죽였습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사마리아를 파괴하고 그 땅에 마케도니아 퇴역 병사들을 정착시켜 버렸습니다. 다른 버전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그의 휘하 장수이며) 이곳에 식민지를 세운 섭정 페르디카스(Perdiccas)가 사마리아를 파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사마리아가 파괴된 것이 이 시기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와디 달리아에 있는 동굴에서 사마리아 피난민들의 파피루스 문서들이 발견되었지요. 그들은 진격해 오는 마케도니아 군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개인적인 문서들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이들을 이곳에 가두고 동굴 입구에 불을 질러 질식시켜 죽여버렸습니다. 사마리아에 마케도니아 식민지가 세워지면서 스켐이 후대 사마리아의 중심지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예리코까지 깊이 침투했던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내륙을 약탈했던 듯합니다. 이 후 이들은 해변 길을 따라 행군하고 있었을 본부대와 아마도 아코에서 합류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대사제 야두아(Jaddua)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전설에 더 가깝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이 가자가 포위되었던 시기에 있었다고 봅니다(유대 고대사 11, 325-339). 탈무드의 자료들도 동일한 전승을 전하지만 여기서 대사제는 의로운 시몬(Simon the Just)입니다. 또 메길랏 타아닛(Megililat Ta’anit) 키슬레브(Kislev, 바빌로니아 탈무드 요마[Yoma] 69a)의 주석에 따르면 대사제가 우연히 알렉산드로스를 만난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고 아펙(안티파트리스, Antipatris)로 내려가는 길에서였습니다.

요르단 건너편의 두 성읍 디움과 게라사는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2) 알렉산드로스의 후기 원정(기원전 331-323년)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땅끝까지 진격하여 많은 민족에게서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세상이 그 앞에서 평온해지니 그는 마음이 우쭐하고 오만해졌다. 그가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지방과 민족과 통치자를 굴복시키자, 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1 마카 1,1-4)”

알렉산드로스의 후기 원정

알렉산드로스는 티로와 다마스쿠스에서 탑사쿠스로 진격하였고, 여기서 유프라테스를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산맥의 산기슭을 따라가면서 티그리스를 지나 가우가멜라에 도달했습니다. 이곳에서 아르벨라 성읍으로 가는 길에 다리우스의 마지막 부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기원전 331년 결전이 벌어졌습니다. 패배한 다리우스는 메디아로, 거기서 다시 카스피 해로 달아났지만, 그곳에서 수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진영에 도달한 것은 몇 시간 후였어요. 그즈음 마케도니아 군은 이미 페르시아 행정 중심지인 바빌론과 수사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다리우스가 죽은 후에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동부를 지나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로 진출하였고 힌두쿠시(Hindu Kush)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 계곡으로 들어갔습니다. 인도의 갠지스 계곡으로 가면서 거의 땅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키며 더 이상 진군하기를 거부했지요.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인더스 강어귀로 갔습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바빌론으로 돌아왔는데, 그 이유는 게드로시아(Gedrosia) 사막 때문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 군은 크라테로스(Craterus) 군, 네아르코스(Nearchus)가 이끄는 해군, 그리고 왕의 군대 등 셋으로 갈라져 돌아왔습니다.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드로스는 서른세 살의 나이로 바빌론에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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