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2: 제논 여행과 안티오코스 3세의 원정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장군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안티오키아를 차지한 안티오코스 3세도 역시 팔레스타인을 정복합니다. 이 시기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팔레스타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제논의 팔레스타인 여행기/ 디아도코이의 계승 전쟁/ 제3차 시리아 전쟁

1) 팔레스타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기원전 320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로는 그의 이복형제로 지적 장애를 가진 필리포스와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4세가 되는 뱃속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실권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이내 왕가의 후계자들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섭정 페르디카스나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Antigonus Monophthalmus)처럼 제국을 온전히 유지하고 싶어하는 이들과 제국 분할을 원하는 지방 제후들 사이의 갈들이 가장 컸습니다. 라고스(Lagos)의 아들로 이집트의 제후가 된 프톨레마이오스(Ptolemy)는 이 중 후자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집트에 굳건하게 자리잡은 그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페르디카스를 물리쳤고, 자신의 영역인 이집트를 지키려고 팔레스타인을 욕심내게 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기 위해 니카노르 휘하의 군대를 육로로 보내면서 자신은 배를 타고 진격했습니다.

2) 제논의 팔레스타인 여행기 (기원전 259-258년)

“스토라토 망대…예루살렘…예리코…(제논의 파피루스 카이로 59004)”

안티고노스를 물리친 다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더욱 힘을 얻었고, 팔레스타인은 이집트 제국의 복잡한 행정에 통합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확립된 행정 구역과 제도는 로마 시대까지 계속 유지되었는데, 대부분은 제2차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은 경제 활동에서 두드러졌어요. 왕실 독점 중개인들은 이집트가 필요로 하는 상품들을 구하러 나라 구석구석을 다녔는데, 주로 올리브 기름(이집트의 올리브기름은 품질이 떨어졌다), 포도주, 목재, 노예 등이었습니다. 카리아(Caria) 출신 아그레오폰 (Agreophon)의 아들인 제논(Zenon)은 이런 중개인 중 한 사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의 제정 장관인 아폴로니오스(Apollonius)의 수하였습니다.

제논의 팔레스타인 여행기

제논의 기록들이 그가 공직에서 은퇴한 후 정착했던 파이윰(Fayum)주(州)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 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통치 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259-258년에 팔레스타인을 여행했다. 스트라토 망대(지중해의 카이사리아)에 상륙한 제논은 아마도 페가이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그는 헬레니즘 시대에 대규모 관개 공사가 시작된 예리코로 갔다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는 포도원의 도시 아빌라로 갔습니다. 이어서 제논은 고대 유대 공국(公國, 유럽 등지에서 공(公)의 칭호를 가진 세급 군주가 통치하는 작은 나라)의 창건자들인 토비아스 가문의 수도이자 군사 식민지인 티루스를 방문했습니다. 그런 다음 라카사(다마스쿠스 근처의 키스웨[Kisweh])에 도착했는데, 다마스쿠스가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 아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에이타(히트[Hit])로 돌아와 그리스 관리의 포도주 생산지가 있던 벳 아낫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데스로 갔고, 프톨레마이스에서 배를 탔습니다. 이 여행과는 상관없지만 제논이 마리사와 요빠 등 주로 남쪽의 여러 행정 중심지에 있는 중개인들이나 관리들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주는 문서들도 발견되었습니다.

3) 디아도코이(계승자)들의 팔레스타인 전쟁 (기원전 315-306년)

디아도코이들의 팔레스타인 전쟁

페르디카스가 죽은 후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애꾸눈)가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르(Demetrius Poliorceters-포위공격자)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중앙 권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안티고노스는 먼저 알렉산드로스 왕가의 마지막 지지자들 특히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Eumenes)를 진압한 후 왕임을 자처하며 다른 동료 장수들과 맞섰습니다. 바빌로니아 총독 셀레우코스(Seleucus)는 이집트의 통치자이자 주요 제국 분할 지지자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로 피신했습니다. 기원전 315-306년에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이집트의 동쪽 접근로(팔레스타인)을 두고 접전을 벌였습니다.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나일 골짜기 경계까지 세 차례나 진격했습니다. 기원전 315년 첫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싸우지 않고 후퇴했습니다. 기원전 312년 두 번째 전투에서는 데메트리오스를 물리쳤지만, 안티고노스의 막강한 군대 앞에서 또다시 후퇴해야 했지요. 그는 물러가면서 팔레스타인의 요새들을 허물고, 예루살렘, 유대아, 사마리아 등지에서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아 이집트로 끌고 가서 정착시켰습니다. 같은 해에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으로 돌아가 동쪽 지역을 선동하여 안티고노스에게 반기를 들도록 했습니다. 기원전 311년에는 안티고노스 군 사령관 아테나이오스(Atheneus)에 이어 데메트리오스가 직접 나바테아의 부유한 요새 페트라를 점령하고 사해 지역과 그곳의 값비싼 역청 자원을 장악하려고 했지만 두 차례 모두 실했습니다.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가 육해 연합으로 이집트를 공격했지만 각각 펠루시움과 나일 강 다미에타 지류에서 패전했습니다. 기원전 301년 프톨레마이오스는 결국 셀레우코스와 또 다른 장군 리시마코스(Lysimachus)와 힘을 합쳤습니다. 셀레우코스가 (인도와의 협정으로) 인도 땅과 맞바꾼 인도 코끼리의 도움으로 연합군은 소아시아의 입소스(Ipsus)에서 안티고노스와 그의 아들을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로 통일 그리스 제국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4) 제3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 246-240년)

“몇 해 뒤에 그들은 동맹을 맺고, 협약을 비준하는 뜻으로 남쪽 임금의 딸이 북쪽 임금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 아들도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와 또 그 여자를 그리로 데려간 자들, 그 여자의 자식과 지지자가 적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때에 그 여자와 같은 뿌리에서 난 가지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 북쪽 임금의 군대를 공격하고 성채로 들어가 그들을 쳐 이길 것이다. (다니엘 11, 6-7)”

입소스 전투가 끝난 후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전쟁 전 셀레우코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와 맺은 협정을 어기고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를 차지했습니다. 아시아 지역의 왕이 된 셀레우코스는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들은 그리 망설이지 않았고, 결국 전쟁이 잇따랐는데 이것이 바로 시리아 전쟁입니다. 제1,2차 전쟁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지만 기원전 255년에는 일시적으로 평화 관계를 회복하여, 안티오코스 2세가 라오디케(Laodice)와 이혼하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여동생인 베레니케(Berenice)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2세가 죽은 후 베레니케가 폐위되고 라오디케의 손에 죽으면서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육해군 합동 작전으로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를 공격하여 두 도시의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바빌로니아를 침공했지만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물러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통치에 호의적이었던 시리아인들은 이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등을 돌렸습니다. 기원전 242년 라오디케의 아들 셀레우코스 2세는 수도로 돌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재탈환하고 유프라테스 강가에 칼리니쿰이라는 성읍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공격받고 있던 오르토시아와 다마스쿠스 수비대를 구출했습니다. 기원전 240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안티오키아의 항구인 셀레우키아만을 점유했는데, 이곳은 기원전 219년까지 이집트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2. 안티오코스 3세의 첫 번째 원정/ 안티오코스 3세의 최후 승리

1) 안티오코스 3세의 첫 번째 원정 (기원전 219-217년)

“북쪽 임금이 내려가서 공격 축대를 쌓고 요새 성읍을 함락하는데, 남쪽의 병력은 정예 부대까지도 그들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당해 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남쪽 임금을 공격하는 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데도, 그들을 아무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북쪽 임금이 영화로운 땅에 자리 잡으면,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다니엘 11, 15-16)”

기원전 223-222년 두 명의 젊은 통치자가 거의 동시에 시리아와 이집트 왕좌에 올랐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통치를 시작했는데, 둘 중 셀레우코스 왕조가 더 강했습니다.

안티오코스는 곧바로 선조들의 염원이었던 팔레스타인을 빼앗아오는 일을 착수했습니다. 기원전 221년 그는 레바논 골짜기를 침공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군 지휘관 테오도 토스(Theodotus)가 브로코이(Brochoi)와 게르하 사이에 구축한 강력한 방어선까지 진출했다. 기원전 219년에는 운 좋게 셀레우키아를 점령했으며, 기원전 218년에는 테오도토스와 그의 참모 파네톨로스(Panetolus)가 안티오코스 팀에 합류를 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들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새로운 사령관 니콜라오스(Nicolaus)를 베이루트(Beirut) 남쪽 다무라스(Damuras) 강에서 물리쳤으며, 시돈과 티로, 그리고 톨레마이스를 정복했습니다. 니콜라오스가 도라(도르)에 봉쇄되어 있는 동안 안티오코스 3세는 티로에서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갈릴레아 연안의 행정 중심지인 필로테리아(벳 예라)와 스키토폴리스(벳 산)의 항복을 받아낸 그는 곧 후퇴를 위장한 계략으로 이타비리움(타보르 산)을 점령하고, 펠라와 게프투스 그리고 카무스를 장악했습니다. 이어 아빌라와 가다라를 공격했는데, 이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성문을 열어 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맹인 나바테아가 필라델피아(라빠 브네 암몬)를 공격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서둘러 필라델피아로 갔다. 수로로 침투해 들어가 도시를 함락시킨 뒤 톨레마이스로 돌아온 안티오코스는 기원전 218-217년 겨울을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등을 돌린 두 명의 군지휘관 히폴로코스(Hippolochus)와 케레아스(Cereas)를 말 5천 마리와 함께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병력을 총동원하고 있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집트인 원군을 모집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7만 명의 군사와 기병 5천, 그리고 73마리 전투용 코끼리들을 이끌고 출정하여 사막을 지나, 기원전 217년 봄에 라피아에 도착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보병 6만 2천, 말 6천 마리, 그리고 코끼리 102마리를 거느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집트가 승리하면서 안티오코스는 팔레스타인에서 물러났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팔레스타인 전지역을 돌며 개선 행진을 했습니다. 그는 마리사(마레사), 예루살렘, 톨레마이스, 그리고 티로에 들렀다가 계속 국경지역으로 행군했습니다. 이로써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통치가 다시 한번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어요.

2) 안티오코스 3세의 최후 승리 (기원전 201-198년)

“우리가 유다인들의 땅에 들어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우리를 돕고 싶어하는 열망이 보였다. (요세푸스 플레비우스의 ‘고대사’ 12:138에서 인용한 안티오코스 3세의 서신)”

안티오코스는 소아시아의 주요 반란을 진압한 후 수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장기간 아시아 내륙 지역을 원정한 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기원전 201년 그의 군대는 가자까지 침투해 들어갔는데, 이곳은 끝까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충성을 다하며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결국 가자를 스코파스(Scopas)가 지휘하는 이집트 군대가 진격해 오자 후퇴했습니다. 스코파스는 내륙으로 향하더니 예루살렘 성문에 예루살렘 성문에 이르렀고(아마도 그곳의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 3세를 지지했는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파니아스(단 근처)로 진격했어요. 안티오코스는 이곳에서 숨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한 프톨레마이오스 군 패잔병들과 스코파스는 시돈으로 도망갔지만, 그곳에서 포위당했습니다.

안티오코스와 그의 군대는 바타네아, 아빌라, 그리고 가다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를 환대하며 군대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또한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아크라(Acra)에 남겨진 스코파스의 군대를 공경할 때도 그의 편에서 싸웠습니다. 안티오코스는 답례로 이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제의에 사용할 정결한 포도주, 기름, 유향, 밀, 그리고 제물에 사용할 밀가루와 소금, 성전 보수에 쓸 목재 등을 주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이 조상들의 율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했으며, 게루시아(Gerousia, 원로회), 사제들 그리고 성전 서기관들에게는 인두세와 소금세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다른 예루살렘 백성들도 3년간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했으며 노역도 삼분의 일로 감면해 주었습니다. 또 죄수를 석방하고 제의상 부정한 고기를 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유대아는 셀레우코스 왕 통치 아래에서 31년 동안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헬라(그리스) 왕국들이 대립과 반목의 소모전을 치르고 있는 동안 서쪽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먼저 이탈리아를 통일한 후 제2차 포에니(Punic) 전쟁(기원전 218-201년)에서 카르타고(Carthage)를 물리쳤지요. 지중해 서부의 패권자가 된 로마는 기원전 197년 마케도이나 왕정을 무너뜨렸고, 이어서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왕국에 임박한 위험에 대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집트에 승리함으로써 남쪽 국경이 안전해지자, 그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고, 기원전 192년에 테르모필라이(Thermoplae)에서 패한 그는 그리스에서 철수를 해야만 했다지요 기원전 190년 그는 소아시아의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최종적으로 패하고 맙니다. 안티오코스는 아파메아(Apamea) 평화 조약에서 소아시아 전체를 포기하고 군사 대부분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과 더불어 막대한 배상금을 치르겠다고 합의했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