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3: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이집트에 기반을 잡고 팔레스타인으로 그 힘을 확장해 갔습니다. 셀레우코스 제국 역시 이집트까지의 원정을 통해 세력을 키웠지요. 당시의 유다인들은 지중해 주변의 여러 나라에 이주해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글의 순서



1.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도시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유다인 디아스포라/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이집트 원정/ 셀레우코스 제국

1)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도시들(기원전 312-167년)

“사람은 정치적 [도시적] 동물이다(아리스토텔레스)”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도시 위치와 이름

그리스인들에게 도시, 곧 폴리스란 문명인들에게 적합한 유일한 정치 조직 형태였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도시 건설은 헬라 문화를 보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지요. 그럼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식민지에 도시 자격을 부여하는데 신중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자치권이 포함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기존의 특혜들을 존중했지만 필라델피아와 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 두 곳에만 왕가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잠시 왕비인 베레니케의 이름으로 불린 펠라와 홍해 연안에 위치한 또 다른 베레니케(엘랏), 필라델포스(Philadelphus)의 누이 이름을 딴 필로테리아(Philoteria) 등은 이들과 동등한 위치를 누렸습니다. 반면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도시들을 상당히 의지했습니다. 따라서 안티오코스 3세와 그 후계자들은 자신들의 통치 아래에 있는 도시들에 대단히 관대했습니다. 그들은 도시들에 왕조의 이름을 붙여 주고 집정관, 입법 회의, 그리고 시민들-모든 주민이 시민은 아니지만-로 구성된 그리스식 도시를 조직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2) 바빌로니아, 소아시아, 그리스의 유다인 디아스포라 (기원전 3-1세기)

“그들[유다인]이 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진노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안티오코스 3세가프리기아 총독에게 보낸 서신)”

이집트에서 비교적 많은 파피루스 고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 유다인들의 정착지 분포도를 아주 자세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헬라 문화권 유다인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헬라 문화권 디아스포라는 셋으로 나뉘는데 초기 바빌로니아 포로, 셀레우코스 왕조가 소아시아 주로 카리아, 팜필리아, 프리기아에 세운 농업 및 군사 주둔지, 그리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상업 중심지에 밀집되어 있는 공동체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1 마카베오 15, 22-23에 나타나 있습니다. “집정관은 이러한 편지를 데메트리오스 임금을 비롯하여 아탈로스, 아리아라테스, 아르사케스에게 쓰고, 또 삼프사케스, 스파르타, 델로스, 민도스, 시키온, 카리스, 사모스, 팜필리아, 리키아, 할리카르나소스, 로도스, 파셀리스, 코스, 시데, 아르왓, 고르티나, 크니도스, 키프로스, 키레네 등 모든 나라에 써 보냈다. 그리고 그 사본을 시몬 대사제에게도 써 보냈다.”

3)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유다인 디아스포라 (기원전 3-1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과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왕비 베레니케,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유다인들이 이 회당을 [바쳤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를 기리는 비문)”

전체 유다 인구를 먹이기에는 그들의 땅이 너무 좁았습니다. 그리스 시대에 이미 포로(유배)나 군사 식민지 등 고대의 인구 이동 방식과 더불어 주변 지역의 물질적 번영을 따라 가족 단위의 이주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지요. 이집트에서는 펠루시움-믹도르, 다프네, 엘레판티네, 키레네 등의 군사 식민지들에서 뿐 아니라 농사를 짓거나 공직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와 아르시노에 지방(파이윰)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면서 이주가 이루어진 곳입니다. 또 많은 이들이 테베(디오스폴리스 마그나-신들의 대도시)와 상부 이집트 및 그 주변 지역에서 살았으며, 이외에도 이집트 전 지역에 유대인 정착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사제직에서 쫓겨난 오니아스(Onias)가 기원전 2세기에 나일 삼각주 중앙에 위치한 레온토폴리스에 세운 성전이 특히 흥미로운데 이곳은 라삐(탈무드) 문학에 ‘오니아스의 집’으로 나타납니다. 이 성전은 제2성전이 무너진 후 곧 파괴되었습니다. 이집트의 고대 도시들에서 발견된 수백여 장의 파피루스 고문서들에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조직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4)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이집트 원정 (기원전 170-167년)

“안티오코스는 자기 왕국이 튼튼해지자, 이집트 땅까지 지배하여 두 나라의 임금이 되려고 작정하였다. (1 마카마카 1,16)”

안티오코스 3세와 그의 두 아들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는 다가올 로마와의 싸움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안티오코스 4세는 모든 신들을 위대한 제우스 아래 흡수하는 종교 통합 방식을 통해 왕국을 강화하려는 열망을 품었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ies)는 아버지인 안티오코스 3세가 유다인들에게 약속했던 종교적인 자율성을 무시하고, 친 헬라파 대사제인 메넬라오스(Menelaus)를 지지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테르(Philometer) 통치 아래서 최악의 시간을 겪고 있었는데, 안티오코스 4세는 이때가 이집트를 정복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원전 170년 그는 이집트를 공격하여 카이우스 산과 펠루시움 사이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멤피스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이집트 왕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후 안티오코스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여 도시를 포위하였으나(기원전 169년) 함락을 앞두고 아시아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리아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 전에 자신이 해임한 대사제 야손(Jason)이 토비야스(Tobias) 집안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점령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에 있는 자신의 군대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안티오코스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성전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기원전 168년 그는 한 차례 더 이집트 원정에 착수하면서 키프로스로 함대를 보냈습니다. 그는 다시 알렉산드리아 반경 6.4km까지 진격했지만, 이번에는 로마의 포필리우스 라에나스(Popilius Laenas, 다니엘 11,18의 ‘장군 하나’)가 그를 맞았습니다. 그는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에서 물러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이 로마인은 안티오코스 주위로 원을 그리고는 “이 원을 떠나기 전에 결정하라”며 강요했다. 결국 안티오코스는 항복했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미시아(Mysia) 용병의 지휘관인 아폴로니오스(Apollonius)와 자기 병사 2만 명을 예루살렘으로 보냈는데, 아마도 다니엘 11,31에서 말하는 “그의 편에 선 군대”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5) 셀레우코스 제국

“또 코끼리들을 잘 싸우게 하려고 포도즙과 오디 즙을 보여 자극시키고 나서, 그 짐승들을 전열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들은 코끼리마다, 쇠사슬 갑옷으로 무장하고 머리에는 청동 투구를 쓴 보병 천 명을 배열시켰으며, 또 코끼리마다 정예 기병 오백 명도 배치하였다. (1 마카마카 6, 34-35)”

셀레우코스 제국

셀레우코스 왕조는 기원전 189년 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에서 패한 이루 소아시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까다로운 평화 조건들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셀레우코스 제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시리아 그리고 이라크와 이란 대부분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셀레우코스 군도 로마를 제외하고는 주위에 기술적으로 맞설 만한 세력이 없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이들의 전투 기술은 팔랑크스(고대 그리스의 밀집대형, 방어진)에 기초한 것이었지요. 팔랑크스는 16열 이상의 군사들로 밀집대형을 구성하는 전투 방식으로 각 열을 구성하는 군사의 수는 전투 규모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팔랑크스를 구성하는 군사들은 긴 창과 방패로 무장했습니다. 사방으로 빽빽하게 창을 들고 조밀하게 늘어선 밀집대형은 무장이 덜 된 상대에게는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측면에는 경장 기병대와 중장 기병대, 경장 보병대 그리고 궁수와 투창병이 위치했습니다. 이들 지원부대는 상대편을 지치게 하여 가능한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요.

셀레우코스 군은 코끼리로 적의 사기를 꺾기도 하고 발사대로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방어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전술은 융통성이 없어 바뀌는 법이 없었습니다. 군사는 대부분 그들이 세운 식민지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서 모집하였는데, 젊은 남자들은 정규군에 들어갔고, 아버지들은 예비군으로 조직되어 비상시에 동원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군에는 용병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정복한 민족들 중에서 징집한 어린 소년들도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무장 병력의 숫자는 총 6만에서 10만 사이였습니다.

광범위한 제국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셀레우코스 군 지휘관들은 전투할 때 신속하고 결정적으로 이기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마카베오 가문이 마주한 현실이었으며 이는 그들의 전략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