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 가문의 항쟁 이야기 3: 마카베오 가문의 정복

마카베오 가문의 아들들이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투에 승리해 성전을 회복하고 정화했습니다. 요나탄, 시몬, 그리고 히르카노스 임금은 주변의 지역을 정복하고 현주민들을 유다교로 개종시키기도 했지요. 이들의 정복활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마카베오 가문과 예루살렘/ 요나탄에 대한 트리폰의 출정/ 시몬의 정복 활동

1) 마카베오 가문과 예루살렘 (기원전 164-141년)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으로 인정하고 그 주변 지역과 함께 십일조와 조세를 면제합니다. (1 마카마카 10,31)”

헬레니즘 문화가 널리 퍼지고 유다인들이 동화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진보적인’ 시민들은(느헤미야가 재건하고 안티오코스 3세 시대에 한 차례 더 보수한) 고대 성벽 내에 있는 산악지대 동쪽의 옛 도시로는 도저히 새로운 ‘안티오키아’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곧게 뻗은 도로들이 직각들이 교차하는 히포다모스 방식(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으로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흰놈의 골짜기와 티로포에온(Tyropoeon) 골짜기 사이에 있는 언덕 서쪽에 도시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 새로운 도시의 서쪽은 작은 골짜기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동쪽 끝에 있는 언덕은 요새 역할을 했지요. 마카베오 시대에는 아크라로 불렸는데, 이것은 성전산 북쪽에 위치한 느헤미야 시대의 성채(바리스) 옛 아크라와는 구별됩니다(아크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마카베오 가문과 예루살렘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산을 점령하고 성전 제사를 재개하면서 도시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이러한 분열 상태는 기원전 141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은 유대아 시대에 이어 다시 요나탄과 시몬의 시대에 시온 산을 장악했으며, 친 헬라파 사람들의 요새는 항상 맞은편에 있었습니다. 요나탄과 시몬은 ‘카페나타(Caphenatha)’라는 포위 벽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딴 구역을 개축하여 아크라 주둔군을 시장(아고라)에서 고립시킴으로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기원전 141년 유다인들은 아크라를 최종 점령한 후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요새 부분을 무너뜨렸습니다(고대사 13:217). 이제 도시 전체를 지배하게 된 마카베오 가문은 산 서쪽을 두르는 성벽을 건설하고, 성전산과 서쪽 산 사이 티로포에온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아크라의 폐허 위에 자신들을 위한 궁전을 세웠습니다. 또한 추가로 망대로 세움으로 ‘성채’를 강화했는데, 이 중 하나는 아리스토불로스 1세(Aristobulus I) 시대에 스토라토 망대로 불렸습니다.

2) 요나탄에 대한 트리폰의 출정 (기원전 143-142년)

“그래서 그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유다와 당신의 아우 요나탄 대신에 이제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1 마카마카 13,8)”

트리폰은 적수인 데메트리오스 2세가 파르티아 원정 준비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유다의 통치자인 요나탄이 지나치게 독자적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자 그 기를 꺾어놔야겠다고 결심했지요. 트리폰은 군대를 이끌고 벳 산에서 그를 맞았습니다. 트리폰의 눈에도 유다인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새인 프톨레마이스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으로 요나탄을 유인해 내어 함정에 빠뜨리려고 결심했어요. 트리폰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벳 산에서 그를 맞았습니다. 트리폰의 눈에도 유다인들을 이기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새인 프톨레마이스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으로 요나탄을 유인해 내어 함정에 빠뜨리려고 마음먹었지요. 트리폰은 요나탄에게 병력 대부분을 고향으로 보낼 것을 종용했고, 요나탄은 3천 명의 호위대만 남겨 두고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두 사람은 해안 쪽으로 행군했습니다. 프톨레마이스 부군에서 프리폰은 (유다인 정착이 재개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갈릴래아 서부와 에스드렐론(이즈르엘)에 추가로 2천 명을 남겨 둘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탄은 천 명만을 이끌고 프톨레마이스로 들어갔습니다. 트리폰과 공모한 프톨레마이스 주민들은 성문을 닫은 후 유다 군을 살육하고 요나탄을 사로잡았습니다.

요나탄에 대한 트리폰의 출정

트리폰은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가는 혼란을 이용하여 그들을 정복하려고 갈릴래아에 남아 있던 요나탄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시몬이 지휘권을 잡고 낙담한 백성들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이에 트리폰은 사로잡은 요나탄을 끌고 유다로 올라갔습니다. 시몬은 휘하의 장수인 압살롬의 아들 요나탄에게 요빠를 점령하고, 그곳에 유다인들을 다시 정착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후 그는 아디다의 새로운 요새 근처에 자기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트리폰은 정면으로 유다 군에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아 과거 리시아스(Lysias)가 사용했던 책략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아도라 근처 분수령을 난 도로로 이두매아 땅을 통과했습니다. 아크라에 갇혀 있던 친 헬라파 사람들이 절망 중에서 도움을 요청했고, 트리폰은 유다 사막으로 강행군하며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눈보라를 만나 따뜻한 요르단 골짜기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획했던 일에 모두 실패한 후 트리폰은 길앗 길로 돌아가면서 바스카마(벳 시크마, Beth-shikma)에서 요나탄을 죽였습니다. 요나탄은 모데인에 있는 가족 무덤에 묻혔습니다. 시몬이 그의 형제를 대신할 백성의 지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3) 시몬의 정복 활동 (기원전 142-135년)

“백성은 평화로이 제 땅을 일구고 땅은 소출을 내었으며 들판의 나무들도 열매를 맺었다. (1마카 14, 8)”

트리폰의 배신으로 시몬이 데메트리오스 2세의 편에 서게 되자 테메트리오스는 기원전 142년에 유다의 독립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유다인의) 대사제이며… 시몬 제일 년’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1 마카 13,41-42)”

그러나 시몬은 현재의 경계에 국한된 유다의 독립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트리폰 당시 요빠를 추가했고 이제는 그 “요빠를 취하여 자기 항구로 만들어 여러 섬에 이르는 바다의 길을” 터 놓았습니다. 또한 그는 공성(攻城) 장비인 헬레폴리스(helepolis)를 이용하여 가자라(게제르)을 점령한 후 요새와 궁전을 세우고 예루살렘 다음가는 군사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크라 사람들을 압박하여 항복을 받아냈지요. 이로써 “큰 적이 망하여 이스라엘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1마카 13,51).

보병과 기병의 전투 장면

(시돈에서 출토된 석판-기병과 보병의 전투 장면)

2. 키드론 전투/ 히르카노스의 요르단 건너편 정복 활동/ 히르카노스의 이두매아 정복 활동/ 히르카노스의 사마리아 해안 평지 정복

1) 키드론 전투 (기원전 137년)

“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진군하여…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나아갔다. (고대사 13:227)”

기원전 137년 안티오코스 7세는 왕위를 노리던 트리폰을 도라(도르, Dora)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유다에서 강한 군대를 거느리게 된 그는 요빠와 가자라(게제르) 등 유다인들이 불법으로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지역들을 시몬에게서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안티오코스는 휘하의 장수인 켄데배오스(Candebeus)를 ‘파랄리아’ 지방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기병과 보병에 대한 재량권을 주면서 유다 경계인 (오늘날의 게데라, Gedera 부근에 있는) 키드론에 요새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켄데베오스는 사령부를 얌니아로 옮기고 유다 주민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키드론 맞은편 가자라(게제르)에 있던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John Hyrcanus)는 이 새로운 위기에 대응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형제인 유다(Judas)와 함께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소렉 계곡 하부에 있는 강(시내)을 사이에 두고 적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군은 평소 방식대로 보병을 중심에 두고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기병대가 거의 없는 요한은 보병을 사이에 기병을 훑어 놓았습니다. 강을 건너야만 하는 까다로운 지형이었지만 마카베오 군이 승리했습니다. 셀레우코스는 처음에는 키드론으로 도망갔다가 다음에는 아조토 영내에 있는 요새들로 달아났습니다. 유다는 키드론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요한은 적을 아조토까지 끈질기게 추격하여 그곳의 요새들을 파괴했습니다.

시몬은 아들들의 승리를 오래 즐기지 못했습니다. 시몬이 예리코 지방관으로 임명한 그의 사위이자 아부부스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가 도쿠스(Dcus)에서 열린 연회에서 그와 그의 두 아들 유다와 마타티아스를 모두 죽인 것이지요(기원전 135년). 그러나 유다를 안티오코스 7세에게 넘기려던 프톨레마이오스의 계략은 실패했습니다. 당시 가자라의 요새에 머물고 있던 요한 히르카노스는 암살을 모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타티아스의 다섯 아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시몬마저 죽었는데, 이들 중 수명을 다하여 죽은 자연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카베오 상권에 기록된 하스모니아 가문의 역사는 이렇게 끝나며,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요한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이끈 전쟁과 그가 보여 준 용맹, 그리고 그가 성벽을 복구한 일이며 그 밖의 업적들은,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사제가 되었을 때부터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마카 16,23-24).” 그러나 이 실록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요세푸스의 ‘고대사’가 유다 역사의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2) 히르카노스의 요르단 건너편 정복 활동 (기원전 128년)

“그리고 메드바를 점령했다…. 다음으로 사마가를 정복했다… (고대사 13:255)”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 7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 전사하면서 한때 강력했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는 사실상 종말을 알렸습니다. 히르카노스는 이제 시리아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의 군대는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했고, 그는 다윗 시대의 영토라고 생각되는 곳들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히르카노스의 요르단 건너편 정복활동

먼저 요르단 건너편 베레아를 정복했는데, 이곳에는 요나탄과 토비아스 가문 시대 이후로 유다인들이 진출해 있었습니다. 히르카노스는 메드바를 공격하여 장기간의 포위 끝에 정복했고, 이어 에스부스 지방의 성읍인 사마가를 점령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카베오 군은 홍해의 아일라(엘랏, Aila)에서 사막의 가장자리를 따라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중요한 국제 무역 도로인 ‘왕의 대로’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리따와 페가이(Pegae) 사이의 해안 도로를 얻게 되면서 히르카노스는 이스라엘 땅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주요 무역 교역로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3) 히르카노스의 이두매아 정복 활동 (기원전 125년)

“나아가 그는 아도라와 마리사(마레사)를 포함하여 이두매아의 수많은 도시들을 점령했다. (요세푸스 플래비우스의 전쟁사 1:63)”

다음으로 히르카노스는 신흥 유다와 그리스 도시들 사이에 고립되어 있던 두 소수 민족, 곧 사마리아인들과 이두매아인들에게 맞섰습니다. 이두매아인들은 전에 트랜스요르단 남부에 살았으나 네부카드네자르 통치아래서 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면서 인구가 감소하자 비어 있던 유다 남부의 비옥한 지역으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이들은 주변 아랍인들과의 접촉이 단절되어 있어서 별로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두매아를 정복함으로 히르카노스는 헤브론과 아도라를 얻게 되었습니다. 헬라 문화를 따르는 마리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이두매아인들은 충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유다교로 개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들의 개종이 강요에 의한 것이었는지 자발적인 것이었는지를 두고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어쨌든 이들은 몇 세대 만에 유다 민족에게 흡수되었으며 이후 이들이 로마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엄청난 용기는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두매아를 정복함으로 유대아 땅은 브에르 세바 오르다까지 확장되었습니다.

4) 히르카노스의 사마리아 해안 평지 정복 (기원전 126-104년)

“(헤쉬반 월) 스물다섯 번째(날)에 사마리아의 성벽이 무너졌다. (단식 두루마리)”

히르카노스는 이두매아로 출정하기 전 사마리아 원정에 먼저 시작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에프라임 산에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히르카노스는 스켐을 정복하고 그리짐 산에 있는 그들의 성전과 작은 성읍을 파괴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자 이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하스모니아 왕가의 동전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고대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모세오경 판본에 그들의 믿음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들은 정통 유다교에 합류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히르카노스는 해안 평지로도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는 안티오코스 7세가 죽자마자(기원전 129년), 기원전 132년에 잠시 잃었던 요빠, 가자라, 페가이, ‘항구(아폴로니아와 얌니아 등) 등의 지역을 재탈환했으며, 죽기 전까지 얌니아 및 아조토와 그 항구도 확보했습니다.

이두매아와 사마리아를 합병하고 나서 히르카노스는 제1의 목표인 그리스 도시들을 향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이 도시들은 스트라토 망대, 사마리아, 스키토폴리스 등으로 해안에서 요르단 강까지 띠를 형성하며, 유다가 북쪽으로 확장하여 갈릴래아와 연합하는 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히르카노스는 기원전 108-107년에 사마리아 성 포위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단식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사마리아 주민들은 히르카노스를 자극하는 한편 한술 더 떠 나브라크타 지방 마리사(마레사)에 있는 유다인들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이 용감하게 저항하면서 사마리아 포위는 힘겨운 장기전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안티오코스 9세 퀴지케노스(Cyzicenus)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그가 스키토폴리스로 왔지만 사마리아로 가는 도중 히르카노스의 두 아들 아리스토불로스(Aristibulus) 1세와 안티고노스(Antigonus)에게 참해하고 말았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에는 아리스토불로스와 안티고노스가 그를 추격하여 스키토폴리스를 점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전쟁사’에는 이들이 이 도시를 이 지역 지휘관인 에피크라테스(Epicrates)에게서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같은 시기에 이들 형제는 카르멜 지역에도 침공했는데 아마 나르바타(Narbata) 지역도 정복한 것 같습니다. 히르카노스는 결국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고고학 발굴로 증명된 것처럼 도시 일부를 파괴하였으며 주민들을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얀네우스(Janneus) 통치 아래에서 다시 사람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유다인들은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3. 유딧기에 나타난 유대아 경계/ 아리스토불로스의 이투래아 정복/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의 왕국

1) 유딧기에 나타난 유대아 경계 (기원전 108-107년)

“이 기간이 끝난 다음에 사람들은 저마다 제 상속 재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유딧도 배툴리아로 가 자기 소유지에서 살았다. 그는 여생 동안 온 나라에서 존경을 받았다. (유딧 16,21)”

유딧기에 나타난 유대아 경계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종종 기록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유딧기라고 할 수 있지요. 사마리아가 포위되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학자 중에는 이것을 페르시아 시대 말기의 전쟁 기사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책의 히브리어 원본은 사라졌고, 현재는 희랍어 역본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유딧기의 기록 시기는 책에 담겨 있는 민족적, 종교적 정신뿐 아니라 주로 저자가 설정해 놓은 가상의 ‘이스라엘’의 경계에 근거해서도 결정됩니다.

유딧기는 “앗시리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에 아시리아의 군지휘관 홀로페르네스(Holophermes)에 의해 포위되었던 ‘베툴리아’라는 성읍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베툴리아는 ‘하느님의 집’을 뜻하는 유다의 베텔에나 사마리아 북쪽에 있는 메이탈룬(Meithalun)과 유사한 이름이며, 홀로페르네스는 페르시아 지방관 명단에 나타나는 이름입니다. 홀로페르네스는 용감한 유다 여자 유딧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 후 혼란에 빠진 그의 군대는 흩어졌습니다. 이 이야기에 포함된 것과 빠진 것을 함께 살펴보면 저작 당시의 실제적인 유다의 통치 범위를 알 수 있습니다. 유딧기에 따르면 네부카드네자르가 ‘카르멜, 길앗, 상부 갈릴래아의 사람들’(유딧기 1,8)과 ‘시돈, 수르(Sur, 티로) 오키나(Ocina, 톨레마이오스, 아코), 옘나안(Jemnaan, 얌니아), 아조토와 아스클론 (유딧 2,28)’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 도시들이 유다의 통치 아래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홀로페르네스는 배툴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 유다의 가파른 산비탈과 마주한 도탄 곁의 이즈르엘로 가서, 게바와 스키토폴리스 사이 (유딧 3,9-10)” 와 그리고 “그들은 배툴리아 근처 넓은 계곡의 샘 옆에 진을 쳤습니다. 그 진의 너비는 도탄을 넘어 벨바임까지 이르고, 길이는 배툴리아에서 이즈르엘 맞은쪽에 있는 키아몬(요크느암)까지(유딧 7, 3)”에 이르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는 또 용병인 ‘에사우와 후손들(에돔)’과 암몬 군대를 아크라베타로 보냈습니다. 이곳은 모크무르(Mochmur) 시냇가(아크라베타와 예리코 골짜기 사이에 있는 와디 아흐마르(Ahmar)(유딧 7, 18)의 쿠스 근처에 위치했습니다. “유대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러한 위험에 맞서 “사마리아 해안 지역”과 코나, 벳 호론, 벨마인, 예리코 그리고 코바, 야제르, 살렘 계곡 (유딧 4, 4)”으로 전갈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사마리아에서 요크느암과 스키토폴리스 남쪽 살렘 골짜기에 이르는 유대아 경계를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키토폴리스 자체나 게바, 카르멜 산, 얌니아, 아조토, 그리고 아스클론 등은 경계 내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또 요르단 골짜기 전체와 트랜스요르단에서 야제르(Jazer)까지 포함되었으며, 프톨레마이스, 티로, 시돈, 필라델피아, 아스클론은 독립된 도시들이었습니다.

2) 아리스토불로스의 상부 갈릴래아 이투래아 정복 (기원전 104-103년)

“이 사람은 인정이 많고, 유다인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친 인물이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 13:319에 인용된 스트라보의 평가)”

아리스토불로스의 상부 갈릴래아 이트래아 정복

요한 히르카노스는 전수를 누리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아의 불운을 예고하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의 분열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왕국은 번영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불로스 1세는 1년밖에 통치하지 못했으나, 이 짧은 기간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세력을 북쪽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투래아인들과 싸웠는데, 하스모니아 왕조를 비판하는 자료들에 의하면 이들을 유다교로 강제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이투래아인들은 아랍 출신 부족들의 집단으로 서로 단합하여 레바논 베카 골짜기와 헤르몬 산에 왕국을 세웠는데, 이들의 세력 범위는 이들 부족 특유의 도기 발견 여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이루어진 상부 갈릴래아 조사를 통해 이투래아인들이 이 시기 동안 내내 유다인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하부 갈릴래아는 커녕 이곳 상부 지역에도 침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리스토불로스는 이투래아인들의 요새는 공격했지만 왕국을 정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투래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투래아인들이 개종을 강요당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외에 하스모니아 왕조에서 이런 공격적인 정책을 썼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3)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의 왕국 (기원전 103-76년)

“이 당시 유다인들이 점령한 시리아의 도시들은 다음과 같다 (고대사 13, 395)”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의 왕국

아리스토불로스의 뒤를 계승한 그의 형제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Alexander Janneus, 기원전 103-76년)는 옛 이스라엘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보통 전장에서는 운이 없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일련의 원정을 성공시켜 마카베오 왕조의 영토에 카르멜 곶( 串)과 함께 도르, 스트라토 망대를 귀속시켰습니다. 또한 가자와 그 주변 성읍에서 이집트 시내의 리노코루라에 이르는 지역, 사해 주변 지역, 그리고 요르단 동쪽의 땅 대부분을 더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적들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기도 했습니다. 키프로스 왕 프톨레마이오스 라티루스(Lathers),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3세와 안티오코스 12세, 그리고 나바테아 왕들을 물리쳤습니다.

요나탄 임금(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의 번영을 비는 노래

(요나탄 임금(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의 번영을 비는 노래)

하지만 얀네우스는 왕조 내에서의 통치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집권층 내부에서 왕가와 사두가이파 추종자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고, 히르카노스 시대에 생겨난 바리사이들이 얀네우스 통치 아래 세력을 키워 모반을 했지만 결국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얀네우스가 다스리던 시기에 마카베오 왕국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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